오피니언

[오늘의 경제소사] 조지 워싱턴의 패배와 승리

1755년 모논가헬라 전투

모논가헬라 전투를 표현한 유화 ‘군인 워싱턴’/ 미국 의회도서관 소장모논가헬라 전투를 표현한 유화 ‘군인 워싱턴’/ 미국 의회도서관 소장



1755년 7월9월 모논가헬라 전투. 자웅을 겨루던 영국과 프랑스가 맞붙었다. 영국의 당시 세력은 북미 13개 식민지. 나날이 성장하며 새로운 땅을 원했지만 두 가지 벽에 막혔다. 하나는 자연방벽인 애팔래치아 산맥. 영국 정부는 애팔래치아 산맥을 넘어 서부로 진출하려는 개척민들을 막았다. 안전을 보장할 수 없어서다. 두 번째는 프랑스 세력의 존재. 영국의 13개 식민지주보다 3.5배 이상의 북미 땅을 차지하는 프랑스에 막혀 북쪽으로도 새로운 땅을 얻을 수 없었다. 프랑스 출신의 모피상이 진출한 광활한 지역에는 프랑스 군대가 있었다.


북미의 영국 식민지들은 병사를 모아 프랑스에 대항하려 했으나 번번이 깨졌다. 북미 식민지의 급조된 민병은 훈련받은 프랑스군을 당할 수가 없었다. 애팔래치아 산맥 서쪽 오하이오의 땅을 얻으려던 측량사 조지 워싱턴에게 소령 계급장을 주고 버지니아 민병대를 출동시켰어도 프랑스군에 막혔다. 부심하던 영국은 대규모 병력을 모았다. 에드워드 브래덕 장군이 지휘하는 1,500여 정규군에 버지니아 민병대 600명을 합쳐 프랑스군의 요새로 보냈다. 영국군의 행군 속도는 느렸다. 하루 2~3㎞가 고작. 늪지대와 모기 탓이다. 작전이 늘어져도 브래덕 제독은 미래를 좋게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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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는 정반대로 나타났다. 영국군 457명이 죽고 450명이 다쳤다. 반면 프랑스군의 인명손실은 27명 전사에 57명 부상. 영국의 브래덕 장군은 치명상을 입고 사망하기 직전 지휘권을 워싱턴 중령에게 맡겼다. 워싱턴이라고 뾰족한 수가 없어 중화기(대포)까지 빼앗긴 캐나다 원정전투에서 크게 졌다. 모논가헬라 전투 이후 264년이 흐른 요즘은 과거와 다를까. 미국사에서 들여다보자. 조지 워싱턴 중령은 브래독 전투 11년 만인 1776년 7월9일 미국 13개 주의 독립을 쟁취하려는 대륙군 총사령관직을 맡았다. 두 차례의 원정 경험에 실패했어도 워싱턴을 고른 미국인들의 혜안이 부럽다. 우리는 과연 올바른 지도자를 선택할 수 있을까.

모논가헬라 전투는 우리에게 무조건 승자만 기억하는 사회의 한계를 말해준다. 워싱턴의 군사적 경험과 능력을 놓고 영국과 미국 사학계의 견해가 엇갈리지만 워싱턴이 패배의 와중에서 전장을 수습해 다음을 기약한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우리에게 묻는다. 한국이라면 워싱턴과 같은 인물이 큰 역할을 맡을 수 있었을까. 전쟁에 나갈 때마다 패전을 기록했던 워싱턴은 독립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미국의 기초를 닦았다. 인재를 아끼는 습속이 아쉽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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