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0년 7월18일, 영국의 왕 에드워드 1세(사진)가 유대인 추방령을 내렸다. 만성절(11월1일)까지 이주를 명령받은 유대인은 모두 1만여명. 202년 뒤인 1492년 이베리아반도의 이슬람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는 레콩키스타(재정복)를 완성한 아라곤·카스티야 연합왕국이 25만여 유대인을 내쫓은 알함브라 칙명에 가려 잘 보이지 않지만 에드워드 1세의 유대인 축출은 국가 단위로 자행된 최초의 유대인 추방으로 손꼽힌다. 웨일스 정복과 보통법 체제 정비, 모범의회 소집과 행정기구 신설, 상류층의 영어 사용 등으로 영국 중세사의 명군으로 추앙받는 에드워드 1세는 왜 이들을 쫓아냈을까. 토사구팽(兎死狗烹)이다.
영국에 유대인들이 본격적으로 진출한 시기는 1066년 ‘노르만 정복’부터. 기독교인의 이자 수취가 금지되던 시대에 대금업으로 자본을 축적했던 유대인들은 영국에서 특별대접을 받았다. 역대 국왕들의 강력한 보호정책 덕분이다. 영국도 유대인 덕을 봤다. 평상시 영국 세입의 약 7분의1이 유대인들에게서 나왔다. 헨리 2세가 1188년 유대인 재산을 실사해 4분의1씩 특별세로 거둔 금액이 6만파운드. 연간 왕실수입 13만파운드의 46%에 이르렀다. 유대인들은 고비마다 거액의 세금이나 뒷돈을 바치면서도 번영 가도를 달렸다. 주요 도시마다 집단 거주지역이 생겼다. 세계금융의 중심지인 런던의 ‘더 시티’도 1189년 유대인 대금업자들과 무역상 거주지로 생성된 곳이다.
이익이 커지며 위험도 늘어났다. 번영 뒤에 질시와 박해가 따랐다. 병자가 발생하면 유대인 탓으로 돌리고 실종된 소년을 유대인들이 산 제물로 바쳤다고 몰아붙였다. 채무자들은 유대인을 공공연히 살해하고 증거를 불태웠다. 결정적으로 십자군전쟁 이후 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 기사단이 금융업을 수행하면서 유대인들의 독점이 깨졌다. 마그나카르타(대헌장·1215년)에도 명기됐던 유대인 견제는 표식 착용, 상업 금지를 거쳐 추방령으로 이어졌다. 유대인은 프랑스와 스페인·폴란드·독일 지역으로 흩어졌다. 추방령 당시 세액이 700파운드로 떨어졌으니 영국은 아쉬울 게 없었다.
유대인들은 내전에 쓸 돈이 필요했던 올리버 크롬웰의 명으로 1655년 영국에 돌아왔다. 명예혁명(1688년)에서도 유대인들이 대거 들어와 영국의 번영을 거들었다. 유대인 출신 영국 총리도 두 명 나왔다. 압박과 설움은 끝났을까. 가해자가 바뀐 채 아직도 진행 중이다. 유대 국가 이스라엘에 배척당하는 팔레스타인의 원한도 깊어만 간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