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무공 이순신 장군만 거북선을 만든 건 아니다. 백남준도 거북선을 제작했다. 우리나라가 처음으로 국제박람회기구(BIE) 공인을 받아 개최한 1993년 ‘대전세계박람회’(대전EXPO)에서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한 대한민국의 위상을 견고하게 하기 위해 정부가 유치한 행사로 지난 1993년 8월 7일부터 11월 7일까지 3개월간 대전에서 열렸고 국내외 1,450만 명의 관람객이 다녀갔다.
국가관들로 꾸려지는 이 행사에 리사이클링(Recycling·재활용)을 주제로 ‘재생조형관’을 만들자고 얘기를 꺼낸 이는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문학평론가 이어령이었다. 과학창조도시, 21세기형 국가 이미지를 과시하는 대전엑스포에서 그는 한국인이 가진 창조의 원동력을 보여주고자 했다. 이 전 장관은 ”미국 사람들이 매년 280억 개씩 내버리는 유리병”의 현실에 “엿장수의 가윗소리가 나면 빈 병을 들고 좇아나오던 우리 어린 시절”의 추억을 더해 빈 병을 모아 건물을 짓자고 제안했다. 여기다 “바느질하고 남은 천 쪼가리도 버리지 않고 모아 아름다운 보자기를 만드는 ‘조각보 정신’”을 얹어 “남들이 다 버린 것을 가지고 남이 피해 가는 쓰레기터에서 아름다운 창조의 꽃밭을 짓자”고 한 이어령이 맨 먼저 떠올린 이는 백남준이었다. 이 전 장관은 1984년 1월 한 신문 칼럼을 통해 백남준 같은 예술가가 탄생할 수 있는 예술적 토양에 대한 논쟁거리를 던진 바 있다.
이후 장관과 예술가의 대담 자리에서 처음 만난 두 사람은 통하는 게 많았고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백남준이 한국을 찾을 때 자주 머문 종로구 평창동의 올림피아 호텔은 지금의 영인박물관 쪽인 이어령의 집과 가까웠기에 이들은 종종 밤을 새워 이야기꽃을 피우곤 했다. 백남준문화재단의 초대 이사장을 맡았을 정도로 작가에 대한 이해가 깊은 이 전 장관이다. 그는 낡고 버려진 텔레비전·피아노 같은 것을 예술로 다시 살게 하는 백남준을 보며 ‘리사이클 아트’를 떠올렸고 이것이 대전엑스포 전시 주제로 확장됐기에 백남준을 참여작가로 초청했다.
지금은 엑스포과학공원 자리에 전시장인 ‘재생조형관’이 먼저 만들어졌다. 빈 병을 거꾸로 꽂아 유리처럼 반짝이는 건축물을 만들자는 것은 이어령 전 장관의 아이디어였다. 실제 설계자는 경합 끝에 1991년 8월 작가 최재은으로 낙점됐다. 그는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활동하는 설치미술가다. 1995년 베니스비엔날레에는 일본관 작가로 참여한 ‘국적 초월’의 거물급 작가다. 예나 지금이나 기발한 상상력은 여전해 지난 2016년에는 비무장지대(DMZ)에 ‘공중정원’을 짓자는 프로젝트로 베니스비엔날레 건축전 본전시에 참가했던 작가다. 그의 주도로 1,200평 대지에 지름 30m, 높이 15m의 원뿔형 ‘유리병 궁전’이 들어섰다. 빈 병만 5만 개가 사용됐다. 지하 2층까지 총 5개의 전시실이 마련됐다. 건물 주변을 깊이 70㎝의 물길이 에워싸 반짝임의 조화를 이루고 물을 뿜어 유리 건물의 열을 식히곤 했다.
층높이 8m의 지하 2층 전시실은 백남준의 대형 비디오설치작품을 위한 맞춤형 공간이었다. 여기에 백남준은 ‘거북선’을 만들어 넣기로 했다. 그는 “우리나라가 내놓은 세계적 발명품의 하나인 거북선을 형상화한 것으로 날개를 달아 미래의 진취적 모습을 담았다”면서 “거북은 환경적으로 보호받는 동물이라 자원의 재활용과 환경보호 등 대전엑스포의 주제와도 맞는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TV만 340대 이상 투입됐다. 1920년대부터 제작된 앤틱TV들로 일부는 작동되는 것이었지만 일부는 진짜 ‘고물’였다. 작동하지 않는 골동 TV케이스 안에 당시의 신형 TV를 넣었더니 관객이 보기에는 옛날 TV에서 선명한 컬러영상이 나오는 셈이었다. 제대로 된 ‘리사이클’이었다. 거북선 하단부에는 “당시에는 최첨단의 신문물이었으나 지금은 골동품이 된” 것들로 채워졌다. 예를 들어 호롱불은 지금에야 사용하는 사람도 없지만 석유가 처음 수입되던 그 옛날에는 밤을 밝혀주는 최신식 물건이었다.
거북선 머리인 ‘용두’는 좌우로 움직였고 입에서는 불 대신 바람이 불어 나왔다. 펄럭이는 오색리본은 뿜어대는 콧김처럼 보였다. 거북선의 폭이 10m에 달했던 것은 양쪽으로 뻗은 날개 때문이다. TV가 4대씩 총 10줄, 좌우 합쳐 80대가 날개를 이룬다. 작품은 ‘거북선’뿐만 아니었다. ‘정약용’ ‘허준’ ‘혜초’ ‘퀴리부인’ 등 역사적 인물을 상징한 TV로봇 4대가 전시됐다.
TV를 2개의 섬 모양으로 쌓아 거북선의 모습을 화면으로 보여주는 ‘한산도’가 있었고, 거북선이 바다에 떠 있는 것을 의미해 양쪽에는 작품 ‘수족관’이 설치됐다. 거북선 왼쪽의 수족관에는 살아있는 거북, 오른쪽에는 물고기를 넣어 함께 전시했다.
세상에 없던 것을 창조하고, 뻔하던 기존의 역사를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그려낸 백남준의 작품들이 그저 순탄하게 제작됐을 리 없다. 우선 ‘너무 많은’ TV들이 문제였다. 뉴욕에 사는 백남준은 유럽 등지를 오가며 쓸듯이 앤틱 TV들을 확보했다. 이들을 갖고 들어와 작품을 만들 계획이었는데 세관이 수입허가를 내주지 않았다. 작품의 제작지원을 맡은 갤러리스트 박영덕의 속이 새카맣게 타 들어갔다. 통관을 위한 예술품 분류 코드를 적을 때부터 난감했다. 회화는 9301, 조각은 9302, 판화는 9303식으로 번호가 있으나 백남준이 창시자인 비디오작품은 분류 항목조차 없었다. 세관 직원은 “앤틱 TV가 뭔지도 잘 모르겠지만, 왜 이렇게 많이 들여오느냐”면서 마치 밀수품 보듯 눈을 흘겼다. 결국 미술평론가인 이경성·오광수 등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이 ‘작품이 맞다’는 것을 보증하는 장문의 글을 썼고, 이를 오명 대전엑스포 조직위원장이 직접 들고 관세청장을 찾아가서야 수입절차가 진행됐다.
‘수족관’도 문제였다. 백남준이 앤틱 TV는 외국에서 들여오고, 수족관은 현지에서 구입하라고 작업지시를 보냈다. ‘수족관’이 될 어항을 ‘작품’이라고 하니 대전엑스포 예산 집행을 맡은 공무원들이 고개를 저었다. ‘일상적 물건’과 ‘예술적 오브제’의 차이를 이해하는 것은 지금도 쉽지 않은 일이다. 예산 견적서 작성부터 충돌이 생겼다. 담당 공무원은 “감사에 불려가고 싶으냐” 겁박했고, 개막 일정이 다가오니 작품계약 체결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제작에 돌입할 수밖에 없었다.
전시를 개막하고 안도한 것도 잠시뿐이었다. 환경단체가 몰려왔다. 백남준이 ‘TV물고기’ ‘TV어항’ 등의 작품을 선보였을 때 전자파에 노출된 금붕어 학대 로 비판받은 적은 있으나, 이번에는 거북이 문제였다. 거북이가 물속과 물 밖을 오가며 등을 말리기도 해야 하는데, 수족관에 거북 쉼터가 없는 것을 두고 동물보호단체가 거세게 비난했다. 지적한 대로 돌을 넣자니 어항이 깨질 수도 있어 엔지니어 이정성이 나무토막을 잘라 임시방편을 삼았다. 거북이 쉴 수 있는 공간이 생기자 항의는 수그러들었다. 거북선 앞쪽에 거북 박제가 붙어 있는 것은 이정성의 아이디어를 백남준이 ‘오케이’ 한 결과다. 박제된 거북은 대전 현지에서 공수했다.
백남준은 ‘버추얼(Virtual)과 버추어스(Virtuous) 거북선’이라는 짧은 글로 작업 의도를 소개했다. 26년 전에 쓴 글임에도 ‘가상현실’을 언급한 그는 “모든 사람이 버추얼(거의 사실과 같은 사이비) 리얼리티라고 떠들고 있으나 버추어스(도덕적으로 진실한) 리얼리티를 말하고 있는 자는 드물다”고 꼬집으며 “거북선에는 세 가지 의미가 애매하게 내포돼 있다”고 설명했다. 첫째는 세계 최초의 장갑선인 거북선이 세계적으로 무지(無知)하다는 것이요, 둘째는 공룡시대부터 살아온 거북의 생태 특성이 ‘인간문화의 감속화·장수화를 노리는 재순환 정신의 상징적 존재’라는 것이며, 셋째로 탑·점술 등 거북이 우리 동이족의 신탁적 표상과 밀접하다는 점을 꼽았다. 그리하여 “비디오, 고물 TV의 재순환, 프랙탈, 홀로그램, 레이저, 실물 수족관까지 망라해 하이아트(High Art)”를 구현했다.
백남준은 위풍당당한 거북선을 앞세운 ‘비디오아트’전 외에도 대전엑스포 주제 중 하나인 미래테마파크전에 초청됐다. 출품작은 1920~30년대 빈티지 자동차 8대를 주인공으로 한 ‘대전의 추억’이라는 작품인데 그 안에 담긴 주제는 그가 일찍이 1974년부터 주장한 ‘전자 초고속도로’였다.
고급스럽지만 더 이상 달릴 수 없는 자동차와 옛날 가마가 공존하고, 차 안에는 한복 입은 마네킹이, 차 밖에는 ‘전자초고속도로’ ‘백남준’ 등을 낙서 같은 글씨가 감싼 작품이다. 당시 돈으로는 100만원을 호가하며 이른바 ‘벽돌폰’이라 불리던 휴대전화를 수십 대 씩 차 안에 넣어두기도 했다. 이들 자동차는 엑스포장 입구에서부터 재생조형관까지 관객 동선을 자연스럽게 이끌었다. 그가 원한 것은 ‘소통’이고 그 소통의 중심에는 ‘사람’이 있기를 바랐다.
백남준은 자신의 ‘전자 초고속도로’를 소개하며 “과거를 알아야 현재를 알고 현재를 알아야 미래를 안다”면서 “자동차 문명은 과거의 상징이고 전자문명은 미래에의 지침이다”라고 적었다. 그는 이 작품들이 “과거의 차를 외포(外包)로 하고, 전화·전자생활의 여러 제품을 내실로 했다”면서 “21세기 전자시대에서 소프트웨어는 정신적 공해는 가지고 올지언정 물질적 공해는 가지고 오지 않는다”고 정확히 간파했다. 백남준은 “정신적 공해는 교육과 예술로 어느 정도 가볍게 할 수 있고 물질적 공해를 없애는 것은 더욱 어렵겠지만 대체 에너지 개발과 리사이클로서 어느 정도 해결할 수 있다”고 내다봤다. 그러나 태양열과 전기자동차의 미래에 대해서는 오히려 ‘비관적’이었다. “그것이 서울·동경·맨해튼 등의 대도시의 집중적 공해를 경감할 수 있으나 오존홀 같은 전세계적 폴루션(pollution·오염)에게는 무력하다”는 이유에서다.
관객들이 열린 차 문을 어찌나 만지고 여닫고 들락거렸는지 자동차 발판이 부러졌을 정도다. 어찌해야 하냐는 물음에도 백남준은 “그럼 문을 닫으면 되지”라며 특유의 융통성과 유연성의 미덕으로 답했다. 전시 자체는 성공이었으나 행사 이후 ‘거북선’은 생각지도 못한 시련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