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인공지능(AI) 산업이 없으니 괜찮은 일자리가 없고 좋은 일자리가 없으니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죠.”
국내의 한 명문대에서 AI 알고리즘을 연구하고 있는 대학원생 A씨의 얘기다. 국내 기업의 AI가 걸음마 수준이다 보니 취업을 한다 해도 보수와 근무환경이 마땅치 않은 상황이라 A씨는 조건이 좋은 중국행을 선택했다. 선전에 위치한 업체는 A씨에게 2년 근무 이후 원하는 대학의 박사과정 진학을 지원하기로 했다.
손정의 일본 소프트뱅크그룹 회장이 “AI를 지배하는 자가 미래를 지배한다”고 말하고 있지만 국내 AI 연구인력들은 해외로 나갈 수밖에 없는 현실에 처해 있다. 미국과 중국 등은 저만치 앞서 가며 이미 관련 생태계를 만들어냈지만 AI 산업 육성 시기가 늦은 한국은 우수 인재를 품을 수 있는 시장도, 산업도 없다. 오히려 규제의 그물에 걸리면 오도 가도 못하게 된다. 곽승엽 서울대 재료공학부 교수는 “전문연구원 제도 폐지 계획이 알려지자 서울대·고대·연대·KAIST·포스텍 대학원생 1,565명 가운데 49%가 해외 대학원 진학을 선택하겠다고 답했다”며 “주력산업의 위기는 인재육성의 위기에서 시작한다는 점을 인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AI 걸음마 수준 韓, 규제만 산적
美中은 생태계 만들며 인재 흡수
배터리도 인력이탈 경고 메시지
주력산업의 위기는 기업의 인재 생태계 붕괴에서 시작되고 있다. 인재육성 시스템이 망가지면서 애써 키운 인재들을 산업 현장이 품어내지 못하고 있다. 우리 산업이 품지 못한 인재는 떠날 수밖에 없다. 지난 3일 전기차 배터리(2차전지) 영업비밀 침해 여부를 놓고 맞소송 중인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은 정부부처로부터 인력유출 ‘워닝(warning·경고)’ 메시지를 받았다. 뒷북조치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두 회사의 다툼이 기술 인력 유출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중국의 인재 빼가기는 하루 이틀 문제가 아니다”라며 “허술한 인재관리가 미래 성장동력 확보에 차질을 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 스위스 국제경영개발대학원(IMD)이 매년 공개하는 두뇌유출지표에 따르면 한국은 지난해 10점 만점에 4.00점으로 조사 대상 63개국 중 43위를 기록했다. 인재 유입보다 유출이 많다는 것이다. 한국의 인재유출은 지난 1996년 37개국 중 6위로 양호했던 반면 2014년 60개국 중 37위, 2016년 61개국 중 46위, 2017년 63개국 중 54위로 악화됐다. 삼성과 LG 등 대기업들이 해외 인재 유치에 혈안이 돼 있지만 정작 우리가 원하는 인재들에게 한국은 매력적이지 않다. 외국계 정보기술(IT) 기업에서 일한 경험이 있는 한 엔지니어는 “한국 기업들은 관련 기반을 만들어놓고 이직을 제의하는 게 아니라 데려오려는 사람을 통해 기반을 만들려고 하는 경우가 많다”며 “그런 환경이라면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성과는 얻기 힘들다”고 말했다.
인재육성을 기업의 처우개선에만 의존해서는 안 된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미래 성장동력이라는 말만 앞세우지 말고 국가 차원에서 규제를 풀고 각종 인센티브와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제대로 된 규제 생태계도 인재 육성의 조건인 셈이다. 무엇보다 수도권 규제는 우수 연구인력 확보의 가장 큰 걸림돌이다. 수도권에는 공장 등의 시설을 지을 수 있는 면적을 제한하고 있기 때문에 정부 허용(특별물량)이 없으면 새로 산업단지를 세울 수 없다. 국내의 한 연구원은 “생활 인프라 부족도 문제지만 지방근무의 가장 큰 단점은 산업 인프라가 부족해 부부가 모두 직장을 잡기가 어렵다는 점”이라며 “아내·자녀와 떨어져 생활하면서까지 지방 소재 일자리를 잡으려는 우수 인력이 어디 있겠느냐”고 하소연했다. ‘불 꺼진 연구소’를 양산하는 주 52시간 근로제도 규제가 인재육성을 가로막는 사례로 꼽힌다. 홍남기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18일 연구개발 분야에 대해 주 52시간 근로제 완화 방안을 검토하겠다고 했지만 관련 방안을 마련하는 데도 시간이 걸릴 것으로 전망된다.
두뇌유출지표 63개국 중 43위
“규제 풀고 R&D클러스터 절실”
우리 주력산업과 인재 시스템을 모래성으로 만든 또 다른 생태계는 기초연구 분야다. 세계 1위라고 자부했던 반도체의 소재 국산화 비율은 50.3%(국제반도체장비재료협회)에 불과했다. 반도체 소재의 기반이 되는 기초화학 분야 연구가 일본에 뒤처지기 때문이다. 전문가들은 인재와 기술이 교류하는 클러스터를 더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한다. 장부승 일본 간사이외국어대 교수는 “한국이 노벨상 등 기초연구 분야에서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복수의 연구 클러스터를 만들고 이곳에서 교수를 스스로 양성하고 교류하는 전통이 만들어질 때 가능하다”고 지적했다. 일본이 도쿄도·오사카부·아이치현(나고야) 등 3곳의 산업 중심에 3개의 연구 클러스터를 만든 것처럼 한국도 서울 클러스터 외에 부산·경남 등에 또 다른 인재와 연구 클러스터를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이화학연구소(리켄·RIKEN)와 같이 인재와 기술, 기업이 선순환되는 조직도 필요하다고 지적한다. 국내의 한 대학 연구원은 “뇌과학 연구의 세계적 석학인 슌이치 아마리 교수가 기계학습의 한 분야를 창조하다시피 하는 등 리켄은 최신 연구에서도 앞서 나가고 있다”며 “한국도 대규모 예산을 투입하고 연구원에게 자유로운 연구활동을 보장하는 리켄 같은 기초과학 연구소가 설립되면 인재와 연구가 융합되는 생태계 조성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