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금융 경제·금융일반

프로그레시브 CEO 그리피스의 담대한 혁신

트리시아 그리피스는 보험청구 부서 말단 사원으로 시작해 CEO 코너 집무실까지 꿰찬 인물이다. 그녀는 81년 역사를 가진 보험사를 21세기 모범 일터이자 강력한 성장 기업으로 탈바꿈시켰다. 프로그레시브 보험사의 이 리더가 어떻게 보험업계의 판도를 바꾸고 있는지 살펴본다. By Aric Jenkins

트리시아 그리피스Tricia Griffith가 직원들의 사기를 진작하기 위해 강연장에 들어섰다. 이슬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11월의 금요일, 프로그레시브 클리브랜드 본사에서 벌어진 장면이다. 그리피스는 줄 맞춰 질서정연하게 앉아있는 60여 명의 신입사원들에게 경쾌하게 손을 흔들며 무대에 올랐다. 그녀는 “안녕하세요(Hiiiiii)”라고 외치며 등장했고, 직원들은 즐겁게 합창하듯 그녀를 반겼다. 그리피스가 CEO에 올랐던 얘기로 말문을 열자, 신입사원들은 열광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 후 올해 54세인 이 CEO는 건축자재 회사에서 초기 매니저 교육을 받던 시절을 얘기하며 자신의 이력에 대해 농담을 던졌다: 그녀가 “나는 지게차 자격증을 갖고 있다. 튜브 관 봉합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하라”고 다소 썰렁한 농담을 던지자, 한 여성 신입사원이 “좋아요!”라고 소리쳤다. 이어 한 참가자가 CEO를 꿈꾸는 사람들에겐 어떤 조언을 하고 싶은지 물었다. 그리피스는 “현재하는 일에 집중해라. 그러면 저절로 눈에 띄게 된다”고 말했다.


그리피스는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스스로도 30년 전 프로그레시브 보험청구 사원으로 일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그녀는 2가지 측면에서 독특한 CEO라 할 수 있다: 현재 그녀가 이끌고 있는 회사에서 말단 사원으로 시작해 최고 자리까지 올랐다는 점, 그리고 24명에 불과한 포춘 500대 기업 여성 경영자 중 한 명이라는 점이다. 하지만 그녀에겐 또 다른 특별한 점이 있다: 비교적 고리타분하고 안정적인 보험업계에서 주목할 만한 회사 혁신을 이끌어냈다는 사실이다. 프로그레시브의 연간 매출 성장률과 3년 연평균 매출 성장률(각각 20.2%와 11.4%)은 애플과 마이크로소프트보다 더 높다. 주가는 지난 12개월간 거의 50% 상승했고, 이익은 2배 이상 성장했다. 2017년에는 올스테이트 Allstate를 추월해 미국 3대 자동차 보험사에 오르기도 했다(1위는 가이코 Geico, 2위는 스테이트 팜 State Farm이다). 그 중에서도 가장 놀라운 사실은 오하이오 주 메이필드 Mayfield에 본사를 둔 이 회사가 지난 3분기 말 순 보험료 300억 달러를 달성했다는 사실이다. 200억 달러를 달성한 지 3년 만에 낸 성과물이다. 81년이나 된 보험사로선 놀라운 성장률이라 할 수 있다.

그 동안 그녀는 사내 문화의 최고 설계자 역할도 수행했다. 직원들을 포용하고 그들에게 영감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감히 말하자면-신명 나는 분위기도 조성했다. 프로그레시브는 2018년 처음으로 포춘 선정 ‘일하기 좋은 기업’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우리는 특히 프로그레시브의 ‘스타트업’ 분위기를 주목했다. ‘해커톤 hackathon’과 직원들의 싱크 탱크 및 실험실 기능을 하는 혁신 공간 ‘거라지 garage’가 대표적 사례이다.

이 같은 문화는 프로그레시브의 뿌리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지난 1937년 개인 자동차 전문 보험업체로 출발한 이 회사는 궁극적으로 고위험 운전자 군을 틈새 시장으로 삼았다. 하지만 그리피스의 지휘 아래 기존 한계를 뛰어 넘었다. 중요한 한 가지 변화는 2015년 일어났다. 당시 회사는 약 8억 7,500만 달러 현금을 투입해 주택보험사 ASI의 지배지분을 매입했다. 자동차와 주택 보험의 시너지 효과를 노린 포석이었다. 프로그레시브는 이 패키지 보험에 가입한 고객들을 ’로빈슨 Robinsons‘이라 부르고 있다. 딱딱한 보험 용어 대신, 그들에게 정감 있게 다가가기 위한 시도다. 회사가 ASI를 인수하기 약 10년 전쯤 고객들의 보험 가입을 유도하는 기간에 그리피스는 단 2년 만에 가입자를 40만 명 에서 100만 명으로 빠르게 늘린 적이 있다. 이는 최근 보험료 증가에 크게 기여했다. 그리피스는 “담대한 목표를 설정”하는 것을 좋아한다고 강조했다. 주요 프로젝트를 위해 전 직원을 규합하고 목표한 투자를 빠르게 진행하기 위해서다. 그리고 주택소유자들을 위한 보험사업에서 이런 과감한 투자는 2017년 ’주택 견적 탐색 툴(HomeQuote Explorer tool)‘의 출시로 이어졌다. 고객들은 이 도구를 활용해 손쉽게 보험료를 비교할 수 있다.

그리피스를 수십 년간 알아온 고위직 동료들-그녀는 이들 중 일부보다 더 빠르게 승진했다-은 그녀에 대해 “직원들과의 관계는 물론 팀워크를 구축하는 데에도 매우 뛰어나다”고 평가하고 있다. 그녀가 예술 작품으로 채워진 프로그레시브 캠퍼스를 걸을 때면, 채 다섯 걸음도 떼기 전에 누군가 “트리시아, 안녕하세요!”라고 인사하는 걸 듣게 된다. 그녀는 매주 금요일, 직원들의 의견을 듣기 위해 점심식사를 함께 한다.

[사진=포춘US]직원 행사에 참여한 그리피스는 첫 인상을 만드는 건 “내 업무 중 가장 재미 있었던 부분이었다”고 말했다.[사진=포춘US]직원 행사에 참여한 그리피스는 첫 인상을 만드는 건 “내 업무 중 가장 재미 있었던 부분이었다”고 말했다.



그녀는 자신이 말단 직원으로 일해봤기 때문에 이 같은 일을 한다고 말했다. 트리시아는 지난 1988년 보험 청구 부서 손해사정 교육생으로 안내광고 전화에 대응하는 일을 했다. 그녀는 MBA과정을 마칠 때까지만 몇 년 더 그 일을 할 생각이었다. 엄마에게 자신이 하는 일을 설명하면, “오! 그 수프회사!”(프로그레소 Progresso로 착각했다)라는 반응이 돌아오곤 했다. 인디애나폴리스의 작은 지점에서 일하던 첫 해, 그녀는 자동차 수리소에서 보험 견적을 내기 위해 종종 차 밑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트리시아는 “당시엔 여성이 많지 않았다”며 “회사 복장 규정은 정장 치마나 딱 붙는 바지, 그리고 앞 코가 막힌 신발로 꽤 까다로웠다”고 말했다. 한 번은 파손된 서스펜션 부품/*역주: 차체 무게를 받쳐주는 장치/을 확인하기 위해, 바퀴 달린 수레를 타고 차량 밑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그녀는 “내가 다시 나오자 남자 10명이 서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며 “이런 상황들을 이겨 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당시를 회상했다.


그리고 정말 그리피스는 그런 환경을 이겨냈다. 청구 부서 내에서 꾸준히 승진을 했고, 마침내 당시 CEO였던 전임자 글린 렌윅 Glenn Renwick의 눈에 들었다. 회사가 새 인사담당 책임자를 찾고 있을 때, 그리피스의 가족과 친구, 동료들은 계속 그녀에게 “직접 렌윅에게 가서 얘기해보라”고 설득했다. 그녀는 “당시 나의 내면에선 ’넌 아마 그 일을 못 할 거야‘, 혹은 ’그럴만한 경력이 없어‘라고 말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는 용기를 냈고, 2002년 렌윅은 그리피스에게 기회를 줬다. 그는 포춘과의 인터뷰에서 “그리피스가 가진 사업적 전문성과 ’사내 문화를 개선할 수 있는‘ 역량을 믿었다”고 밝혔다. 인사 책임자로 첫 임원 업무를 맡은 그녀는 회사의 첫 번째 다양성 및 포용성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2007년 사내에 아프리카계 미국인, 성 소수자, 그 외 소수 계층을 위한 네트워크를 구축한 것이었다(회사는 이후 7개 이상의 그룹을 추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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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팀에서 일정 기간을 근무한 뒤, 그리피스는 2008년 청구사업부 사장으로 컴백했다. 그리고 이어 고객운영 총괄 사장과 개인보험 사업부 최고운영책임자(COO)를 역임하며 리더십 경력을 공고히 다졌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회사 경영의 근간이 되는 운영 실무에 더 익숙해졌다. 그리고 15년 후인 2016년 렌윅의 CEO 임기가 끝났다. 그 때 그리피스는 회사 수장에 오를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 동안 그녀는 직원들에게 친근하게 다가가기 위해 많은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그들이 회사와의 유대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사기를 진작하는 것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는 점을 깨달았다. 그래서 지난 가을 프로그레시브 광고에 가상 판매캐릭터로 등장하는 ’플로 Flo‘의 10주년 근속을 축하했다. 그리피스와 회사 담당 팀이 플로 역할을 한 여배우 스테퍼니 코트니 Stephanie Courtney를 초청해 2일간 국내 투어를 진행하기로 한 것이다(고객들은 계속 플로에 대해 묻지만, 대부분 직원들은 플로를 직접 본 적이 없다). 그리피스는 코트니를 편안하게 해주기 위해, 최고 경영진을 플로리다로 내려 보내 사전에 그녀와 만나게 하기도 했다.

그리피스에겐 EQ만 있는 게 아니다. 실제로 그녀는 A.I. 기반 기술에 대규모 투자를 하며, 비감성적 측면도 챙기고 있다. 그녀의 지시로 프로그레시브는 2017년 스냅샷 Snapshot이라는 모바일 앱을 출시했다. 이 운전습관 연계 보험 프로그램은 텔레매틱스를 활용해 고객들의 운전 스타일에 따라 보험료를 부과하고 있다. 프로그레시브는 스냅샷 출시 이후 15억 마일 이상의 운행 기록을 수집했다고 밝혔다. 회사는 이 데이터를 통해 다양한 변수의 운전 방해요소를 측정하는 알고리즘을 개발하기도 했다. 운전자의 핸즈프리 사용 및 대화 빈도가 대표적 변수들이다. 그리피스는 “가장 중요한 점은 어떤 리스크가 더 많은 손해로 이어질까를 파악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다른 보험사들도 비슷한 상품을 내놓고 있지만 프로그레시브의 분석 방법이 가장 혁신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웰스파고 증권의 애널리스트 엘리스 그린스펀 Elyse Greenspan은 “프로그레시브는 과거부터 경쟁사들을 따돌리는데 아주 능했다”고 말한다. 스냅샷 같은 프로그램으로 고위험 운전자군에겐 더 높은 보험료를 청구하고, 안전 운전을 하는 고객들에겐 할인을 해줄 수 있다. 이는 회사의 수익성을 보장하는데 매우 중요한 장치다.

검은색 회사 아우디 세단 뒷좌석에 자리를 잡은 그리피스는 자신의 여정에 대해 골똘히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녀는 필자에게 “랩을 듣는 금요일”이라며, 차 오디오에서 나오는 음악(We usually do Drake)에 대해 말했다). 그렇다면 그녀는 어떤 일 때문에 밤잠을 설칠까? 기후 변화는 주택소유자 관련 보험사업의 새로운 위험으로 떠오를까? 자율주행차가 보편화되면 과연 누가 자동차 보험에 가입할까? 같은 것들이다. 그녀는 “세상은 빠르게 변한다. 그래서 우리도 함께 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하지만 적어도 그녀는 유리한 위치에서 변화를 모색할 수 있다. 그녀는 다양한 상품을 앞세워 왕국으로 성장하고 있는 보험사의 운전석에 앉아 있다. 현재 두 회사를 제외하곤 모든 경쟁자들이 프로그레시브에 뒤처져 있다.

안재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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