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기자의눈]번지수 잘못 짚은 정부

김우보 경제부




“세계무역기구(WTO)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만큼 공정한 곳이 아닙니다. 우리 논리가 이치에 맞다고 국제 사회가 편들어줄 것이라는 기대는 순진해 보입니다.” 국제 중재 기구에서 오랫동안 근무했던 전직 관료의 말이다.

지난 26일 WTO 일반이사회에 참석하고 돌아온 김승호 산업통상자원부 신통상질서전략실장은 “한국이 편한 날짜에 WTO 제소에 나설 것”이라며 “열심히 칼을 갈고 있다”고 말했다. WTO 회원국의 비공식 지지 의사를 받았다고 덧붙였다. 그런데 국제 사회의 반응은 결이 사뭇 다르다. 로이터 등은 일반이사회 직후 ‘한국이 WTO에서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실패했다’고 보도했다.


언제일지 가늠하기도 어려운 시점에 승소를 따낸다고 해도 판결 전까지 입은 피해를 보상받을 길은 없다. 미국은 2013년 삼성전자 등이 한국에서 만들어 수출한 세탁기에 10%대의 반덤핑·상계 관세를 부과했다. 정부는 미국이 국제 협정에서 금지한 방식으로 한국 기업의 덤핑 마진을 부풀렸다고 보고 WTO에 즉각 제소했다. 3년이 지나서야 WTO는 한국 정부의 손을 들어줬지만 상처뿐인 승리였다. 공방을 벌이는 동안 관세는 여전히 유지됐고 그사이에 삼성은 국내 생산을 포기하고 해외로 수출 기지를 옮겼다.

관련기사



각국이 겉으로는 자유 무역을 외치고 있지만 슬로건에 그칠 때가 적지 않다. WTO에만 국한된 얘기일까. ‘우방’ 미국은 일본의 부당한 조치에 함께 대응해 달라는 한국의 요청에 한일 간의 협의를 통한 문제 해결이란 원론적 입장을 내놨다.

‘칼을 갈고 있다’는 발언이 다소 버겁게 느껴졌던 것은 그래서다. 강대국이 공정무역을 훼손하는 일은 비일비재한데다 바로잡기도 쉽지 않다.

대법원은 2012년 일본 기업이 일제 강제징용 피해자에게 위자료를 지급하라는 역사적 판결을 내렸다. 판결 이후 7년여간 파장을 애써 외면하는 동안 양국 간 불화는 차곡차곡 쌓였고, 결국 여기까지 왔다. 겉돌기엔 남은 시간이 많지 않아 보인다. 일본이 예고한 수출규제를 강행하고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일본 기업 자산을 매각해 현금화하면 양국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 것이라는 우려가 적잖다. 한일관계 기초였던 한일협정과 대법원 판단 사이에서 묘수를 찾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렇다고 외면해서 될 일은 아니다./ubo@sedaily.com

김우보 기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