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가정은 서로 비슷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각기 다른 이유로 불행하다.’ 수많은 영화와 연극으로 만들어져 심금을 울렸던 러시아 대문호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불멸의 명작 ‘안나 카레리나’의 첫 문장이다. 모순과 허영으로 둘러싸인 19세기 러시아 상류사회의 다양한 인간군상이 등장하는 당시 사회현상을 압축한 이 문장은 문학을 넘어 다양한 분야에서 인용된다. 경제에서는 ‘국가 번영의 길은 대부분 비슷하지만 쇠퇴로 가는 길은 각각 다르다’고 해석할 수 있다.
정부는 아직 2%대 성장률이라는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있지만 현 상태에서 획기적인 처방이 없다면 올해 1% 성장률 시대가 올 것 같다. 그렇게 되면 경제개발 5개년계획을 시작한 후 세계적 불황과 극심한 정치혼란을 겪었던 1980년의 -1.7%, 외환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었던 1998년의 -5.5%와 2009년의 0.8% 성장 이래 네 번째로 1%대 이하의 성장이 될 것이다. 앞의 세 번은 외부 충격이 컸던 결과지만 올해 한국 경제가 내리막으로 치닫게 된 것은 정책실패도 한몫했다. 사실 외환위기 이후 한국 경제는 글로벌 분업구조의 혜택과 튼튼한 인구구조로 고성장을 쉽게 달성했지만 이 긍정의 요인들이 부정의 부메랑 요인이 되고 있다. 왕성한 경제활동과 소비를 했던 베이비붐 세대가 은퇴하기 시작했고 중국이 소비 중심의 내수기반 확충, 민간부문의 레버리지 축소 등 질적 성장전략을 추진하면서 대중 수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한국 중간재 수출에 빨간불이 켜졌다.
주력산업의 위험신호는 문재인 정부 출범 전 이미 시작됐는데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다. 한국은행 기업경영분석에 의하면 제조업 매출이 2014년에 건국 이래 처음으로 전년 대비 1.6%나 감소했고 반도체 특수가 일어나기 전인 2016년까지 3년간 감소세가 이어졌다. 올 1·4분기에도 제조업 매출은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 3.7%나 줄었다. 물론 반도체 업황이 부진한 것이 주원인이지만 제조업 역성장이 다시 재발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높다. 경제 버팀목인 수출은 글로벌 반도체 불황 등으로 지난해 12월부터 8개월 연속으로 감소하고 있다.
정부는 뒤늦게 제조업 부가가치율을 현재 25%에서 30%로 끌어올리고, 생산액 중 신산업·신품목 비중을 16%에서 30%로 높이며, 세계 일류기업을 2배 이상으로 확대하는 등 ‘세계 4대 제조 강국(수출규모 기준)’으로 도약한다는 ‘제조업 르네상스 비전’을 제시했다. 하지만 제조업 부흥전략은 정부 선언으로 실현되는 것이 아니다. 셰일 생산으로 에너지 독립을 이룬 미국이 동북아시아 제조업 기지화나 걸프해의 에너지 기지화라는 글로벌 분업 구도의 양대 축을 깨고 있고 각국 정부는 각자도생의 시대를 대비하고 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 와중에 에너지 의존도가 높은 제조업을 가진 한국이 에너지 지정학 변동을 치밀하게 고려한 에너지 안보 고민 없이 제조업 강국이 가능할 것인가.
지금 한국 경제는 가계소비라는 수요 측면뿐 아니라 기업의 생산성이라는 공급 측면도 심각한 상황이다. 기술 발전과 인구구조 변화 속에서 어떻게 공급부문에서 생산성을 높이고 기업들의 경쟁력을 유지할지에 국가 역량을 집중해야 할 때다. 그런데도 규제 개혁, 노동 개혁, 부실기업 구조조정, 산업구조 개편은 말잔치만 무성했지 실현된 것이 없다. 정책을 시행할 때는 이 정책이 없으면 안 될 것처럼 난리를 치다가도 지나가 버리면 그만으로 정책의 사후평가는 매우 미약하다. 이제라도 늦지 않았으니 의도치 않은 정책 실패를 예방하기 위해 미국·영국 등 대다수 선진국이 택하고 있는 ‘증거기반 정책 결정’을 정부 운영의 중요한 원칙으로 선언해야 한다.
조지프 슘페터의 지적대로 창조적 파괴를 통한 시장 확대가 있어야 성장도 분배도 할 수 있다. 승자도 있지만 패자도 있으므로 영향을 받는 이해당사자들을 모두 고려해 포용적으로 수립돼야 한다. 이를 위해 다양한 출처의 자료를 기반으로 최선의 증거를 활용해야 하며 정책수행의 성과를 바탕으로 학습해 다시 정책의 수립에 반영할 수 있는 환류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야말로 성공의 필요조건이다. 혁신적 경쟁의 결과로 발생하는 일자리 이동에 대비해 확실한 사회 안전망을 구축하고 교육훈련을 강화해야 한다. 정책 실패에 대해 과거 정권의 탓을 하거나 각기 다른 이유를 대는 것은 경제 쇠퇴로 이르는 길이다. 번영하는 국가의 성공 요인은 다 비슷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