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자 없는 게임’이라는 문재인 대통령의 말처럼 한일갈등의 악화는 양국에 상처만 남길 것이라는 우려가 크다. 한국 정부가 8일 일본의 화이트리스트 제외를 유보하고 일본 정부도 이에 맞춰 반도체 소재 3대 규제품목 중 하나인 포토레지스트에 대한 한국 수출을 한 건 허용한 것은 확전을 우려하는 국내외의 여론이 작용한 것이라는 평가가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최종 목적지가 천 길 낭떠러지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한일 양국이 폭주기관차를 멈추지 못하는 것은 브레이크가 돼 줄 명분이 없는 탓이다.
서경펠로 및 일본 전문가들은 8일 현재 한일 경제전쟁의 근본원인이 된 강제징용 배상판결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ICJ)에 회부하는 방안이 양국의 갈등을 해소하는 명분이 될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원덕 국민대 교수는 “징용공 판결 문제를 ICJ에 회부하면 일단 휴전의 효과를 볼 수 있다. 양국이 ICJ에 합의하면 아베 내각은 징용공 판결이 원인이 된 수출규제 조치를 철회해야 한다는 압박을 받을 가능성이 있다”며 “아베 총리가 보수 지지층과 정치적 부담으로 수출규제 조치를 당장 철회는 하지 못해도 실제 한국에 대한 화이트리스트 집행은 유보할 수도 있다”고 진단했다.
특히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내각에서 한국의 화이트리스트 제외 결정을 내린 후 첫 공개 석상에서 사실상 보복조치의 원인을 징용공 판결이라고 스스로 고백한 만큼 우리 정부가 ICJ 회부에 응할 경우 수출규제에 대한 명분도 약해질 것으로 전망된다.
서경펠로(자문단)인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일본은 징용공 배상판결에 따른 일본 기업에 대한 현금화 조치를 가장 큰 문제로 보고 있는 것 같다”며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한 것은 수출규제지 금지조치가 아닌 만큼 일본은 일본 기업에 대한 징용공 피해자들의 현금화 조치가 현실화되기 전 우리 정부에 이 문제를 해결해달라는 신호를 보낸 것으로 생각된다”고 해석했다.
해당 문제에 대한 해법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대화를 통한 소통이 중요한데 ICJ 회부는 양국이 협상을 시작할 수 있는 마중물이 될 수 있다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하종문 한신대 교수는 “지금은 일본이 접촉 자체를 아예 거부한 상황이기 때문에 한일 갈등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며 “ICJ 회부를 위한 논의를 진행하면서 한일 양국은 외교적인 절충을 시도할 수 있는 시간을 확보할 수 있다. ICJ를 수용하면 외교적 협상 테이블이 만들어지고 그런 방식이 오히려 외교적 절충과 정치적 타결 가능성을 높일 수 있다”고 조언했다.
ICJ를 수용할 경우 한국은 국제 여론전에서도 일본보다 우위에 설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할 수 있다.
하 교수는 “청와대는 법리상으로 개인청구권이 소멸하지 않았다고 줄곧 주장해왔다. 이는 국제법으로 싸워도 이길 수 있다는 얘기 아닌가”라며 “국내에서 이길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면서 이 문제를 밖으로 끌고 가지 못하겠다고 하면 국제적으로 누가 지지해줄 수 있겠나”라고 반문했다.
ICJ에서 한국이 무조건 질 것이라는 건 지나친 기우라고 전문가들은 평가했다. 이 교수는 “불법지배에 대한 개인청구권은 소멸되지 않았다는 국제법 흐름 등 ICJ에 회부되도 한국이 승소할 수 있다고 본다”며 “만에 하나 패소한다고 하더라도 결론은 한참 뒤에 나온다는 점을 알아야 한다. 재판이 진행되는 동안 명분을 잃은 일본의 경제보복 강도는 약해질 것이고 아베 정권도 바뀌어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일본이 대외적으로 안보상의 이유로 한국에 대한 보복조치를 단행한 만큼 징용공 배상문제를 ICJ에 회부한다고 해도 일본 정부가 수출규제 조치를 철회하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최은미 국립외교원 교수는 “일본 입장에서 자기들은 강제징용 문제와 관계가 없다고 하면서 한국을 화이트리스트에서 제외했는데 한국이 징용공 문제에 대한 해법을 내놓는다고 해도 이를 철회하는 것은 일본 스스로 여태 한 말을 부정하는 꼴이 된다”고 판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