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 사회일반

우리나라 화폐에 독립운동가는 없고 친일파 작품만 있다?

화폐 속 인물화, 친일파 예술가들의 작품 논란

“친일 전력 화가들 작품, 정부가 쓰지 말자” 법안 나왔지만 통과 안 돼

‘친일 논란’ 김은호 선생의 신사임당 표준 영정(왼쪽)과 오만원권 화폐 인물화(한국은행)‘친일 논란’ 김은호 선생의 신사임당 표준 영정(왼쪽)과 오만원권 화폐 인물화(한국은행)



국내 화폐에 실려 있는 위인의 인물화가 친일파의 작품이라는 주장이 제기됐다. 올해 발행 10주년을 맞은 5만 원권 속 신사임당을 비롯해 1만 원권 속 세종대왕·5,000원 권의 율곡 이이·100원 주화의 이순신 장군의 인물화가 논란의 대상이다.

한일 갈등이 장기화하며 반일 운동이 한창인 가운데 최근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대한민국 화폐에 새겨진 친일파의 흔적’이라는 게시글이 공유되고 있다. 해당 글에 따르면 국내 화폐에 새겨진 위인들의 인물화 일부는 친일파 예술가가 직접 작업했거나 이들의 작품을 재현한 것이다. 작성자는 “우리가 무심코 사용하는 지폐와 동전 일부도 친일파의 잔재”라며 “하나하나 바뀌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해당 지폐와 주화에 실린 작품의 작가들은 정말 친일파일까.


5,000원 권과 5만 원권 속 인물화는 ‘화폐 화가’로 알려진 이종상 서울대학교 명예교수의 작품이다. 그러나 이 명예교수의 작품은 철저히 그의 스승인 이당 김은호 선생의 표준 영정을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표준영정이란 한국 역사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민족적으로 추앙받고 있는 위인들의 영정 난립을 방지하기 위해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정한 영정을 말한다. 현재 한국 화폐에 들어가는 초상은 표준 영정을 사용하고 있다. 위조지폐를 비롯한 각종 범죄를 예방하기 위해서다.

화폐 속 영정의 교체를 주장하는 이들이 제기한 문제는 율곡 이이와 신사임당의 표준 영정 작가인 김은호 선생이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등재된 인물이라는 점이다. 그는 지난 2009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에 의해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등재됐다. 그는 중일 전쟁 발발 직후인 1937년 애국금차회의 활동 모습을 담은 <금차봉납도>를 제작해 조선총독부에 증정하는 등 태평양전쟁 기간 중 미술계에서 적극적인 친일파로 활동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는 조선미술가협회 일본화부에 참가해 전쟁 지원을 위한 친일 미술 작품을 심사하거나 전시하는 데에도 여러 차례 참여했다.

5만 원권 발행 논의 당시 김은호 선생의 영정 채택이 부적절하다 논란이 일자 한국은행은 아예 새로운 영정을 그리기로 하고 이종상 화백에게 작업을 의뢰했다. 복식과 머리 모양도 바꾸고 다른 지폐 인물처럼 15도 정도 측면을 바라보는 모습으로 수정하려는 취지였다. 그러나 당시 이종상 화백이 김은호 선생의 제자로 알려지며 또다시 논란에 휩싸이기도 했다.

김기창 선생의 ‘세종대왕’ 표준 영정(왼쪽)과 일만원권 화폐 인물화(한국은행)김기창 선생의 ‘세종대왕’ 표준 영정(왼쪽)과 일만원권 화폐 인물화(한국은행)


장우성 화백의 ‘이순신’ 표준 영정(왼쪽)과 100원 주화 인물화(한국은행)장우성 화백의 ‘이순신’ 표준 영정(왼쪽)과 100원 주화 인물화(한국은행)


1만 원권에 실린 세종대왕 초상의 작가 운보 김기창 선생도 김은호 선생과 함께 친일 반민족 행위자로 등재된 예술가다. 그는 조선총독부의 산업 정책을 뒷받침했던 일제 강점기 시절 특수은행 식산은행의 사보 표지에 <총후병사>,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등 친일 성향의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는 세종대왕뿐 아니라 신라 문무왕, 무열왕, 을지문덕, 임진왜란 당시 의병장을 맡은 조헌의 표준영정을 작업했다.


100원 주화 속 이순신 장군의 모습을 그린 월전 장우성 화백도 지난 2009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발간한 ‘친일인명사전’에 이름을 올렸다. 장 화백은 일본이 전쟁을 부추기기 위해 만든 ‘결전미술 전람회’에 입선했으며 한국인 최초로 1943년 선전에서 국민예술에 앞장설 것을 결의하는 등의 친일 활동을 펼친 인물이다. 그가 그린 유관순 열사의 표준영정은 친일 논란과 함께 영정 속 얼굴이 열사의 용모와 다르게 표현됐다는 지적에 따라 2007년 새로운 영정으로 교체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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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인명사전 발간 당시 장우성의 후손들은 민족문제연구소 측을 상대로 이에 반발하는 소송을 냈다. 그러나 대법원까지 이어진 소송전에서 재판부는 이를 모두 기각했다.

1만 원권과 100원 주화 속 초상을 교체해야 한다는 주장은 한은이 2005년 새로운 디자인의 지폐를 발행했을 당시 이미 제기됐던 문제다. 그러나 한은은 “문체부가 지정한 표준영정에 충실할 뿐”이라는 입장을 내놓은 바 있다. 당시 한은은 조폐공사에 인물초상 외의 모든 도안을 새로 만들어 줄 것을 의뢰했으며 “인물초상의 크기를 줄일 수는 있지만 현재의 모델을 교체하거나 보정할 생각은 없다”고 밝혔다. 이어 한은은 “친일 논란이 있는 작가의 그림을 도안에서 빼는 문제는 문체부가 그들의 작품을 표준영정 지정에서 해제한다면 그 후에나 생각해볼 사안”이라고 덧붙였다.

오만원 권 지폐/연합뉴스오만원 권 지폐/연합뉴스


최근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한국 화퍠 속 위인의 인물화는 친일파의 작품’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해당 글 작성자는 “친일파로 알려진 작가의 작품이 실린 화퍠가 유통되면 안된다”며 “앞으로 만들어질 화폐에는 독립운동가의 초상이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최근 각종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한국 화퍠 속 위인의 인물화는 친일파의 작품’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해당 글 작성자는 “친일파로 알려진 작가의 작품이 실린 화퍠가 유통되면 안된다”며 “앞으로 만들어질 화폐에는 독립운동가의 초상이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화폐 속 초상과 관련해 국회 내 논의가 없던 것은 아니다. 지난 2015년 국회에서는 당시 새정치민주연합 소속 배재정·조정식 의원이 친일 전력 화가들이 그린 초상화를 정부가 나서 쓰지 말도록 하자는 법안을 각각 발의했다. 그러나 여야의 첨예한 논쟁 끝에 해당 법안은 통과되지 못했다. 당시 새누리당 소속 김희선 의원은 교체 비용을 문제 삼으며 “그림에까지 그런 관점을 적용하는 것은 무리”라 반박했고 같은 당 신성범 의원도 “지금까지 다 그걸 봐왔는데 그때는 우리가 얼이 없었느냐”고 반문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내 화폐에 친일파 작가들의 작품이 사용된 것을 접한 대중들은 분노하고 있다. 한 네티즌은 “이렇게 친일의 잔재가 자리 잡은 줄 몰랐다”며 “비용이 드는 것은 사실이지만 언젠가는 해야 할 일”이라며 표준영정의 교체를 요구했다. 또 다른 네티즌은 “이러한 문제가 지금까지 국회에서 집중적으로 논의되지 않은 점이 안타깝다”고 밝혔다. /신현주 인턴기자 apple2609@sedaily.com

신현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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