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이하 한국시간) 정현(23·제네시스 후원)의 경기를 본 시청자들 중 상당수는 열성 팬이 아닌 이상 중간에 중계를 껐을 것이다. 세트 스코어 0대2까지 본 뒤 ‘안 되는구나’하고 돌아서거나 5세트 게임 스코어 1대4까지 지켜본 뒤 ‘그래도 잘했다’며 다음을 기약했을 것이다.
그런데 분명히 다 진 경기를 정현은 이겼다. 세트 스코어 0대2를 2대2로 만든 뒤 마지막 세트 게임 스코어 1대4, 2대5의 열세를 7대6으로 뒤집었다. 남자프로테니스(ATP) 투어 홈페이지는 “올해 US오픈에서는 유독 5세트 접전이 많은데 그중에서도 정현은 ‘5세트 광란’의 하이라이트를 장식했다”고 소개했다.
기적의 역전승을 거둔 정현이 강력한 우승 후보인 ‘왼손천재’ 라파엘 나달(2위·스페인)과 맞붙는다. 정현은 미국 뉴욕의 빌리진 킹 내셔널 테니스센터에서 계속된 시즌 마지막 메이저대회 US오픈(총상금 5,700만달러) 남자단식 2회전에서 페르난도 베르다스코(36·스페인)를 3시간22분 혈투 끝에 3대2(1대6 2대6 7대5 6대3 7대6)로 꺾었다. 베르다스코는 세계랭킹 34위, 정현은 170위다. 지난해 1월 메이저 호주오픈에서 4강 신화를 썼던 정현은 이후 부상에 발목 잡히면서 19위(지난해 5월 기준)였던 랭킹이 뚝 떨어졌다. 허리 부상 탓에 올해 전망도 어두웠으나 지난달 말 투어 대회보다 한 등급 낮은 ATP 청두 챌린저에서 우승하면서 재기 조짐을 보였고 이번 대회 예선 3연승과 본선 1·2회전 연속 5세트 승리로 나달을 만나는 흔치 않은 기회를 얻었다.
정현은 지난해 호주오픈 16강에서 노바크 조코비치(1위·세르비아)를 3대0으로 물리친 경험이 있다. 4강에서는 로저 페더러(3위·스위스)와 2세트 중 발바닥 부상으로 기권했다. 이번에는 ‘빅3’ 중 나달을 만났다. 2회전에서 상대 기권으로 체력을 아낀 나달과 9월1일 오전 16강 티켓을 다툰다. 역대 전적은 2전 전패다. 지난 2017년에만 두 번 만나 두 번 다 0대2로 졌다. 메이저대회 맞대결은 처음이다.
이날 첫 두 세트를 무기력하게 내준 정현은 3세트 들어 베르다스코가 21개 실책을 범하는 틈을 타 승부를 4세트로 몰고 갔다. 4세트를 비교적 수월하게 따낸 뒤 5세트에서는 2대5로 벼랑에 몰렸다. 하지만 정현은 서브 게임을 지켜 한숨을 돌렸고 5대6까지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이후 30대40으로 매치포인트에 몰리기도 했지만 상대 실책으로 타이브레이크를 만들었고 초반 5포인트를 내리 따내 대역전 드라마를 완성했다. 정현의 메이저 32강 진출은 2017년 프랑스오픈 3회전, 지난해 호주오픈 4강에 이어 세 번째다. 상금 약 1억9,600만원을 확보한 정현은 매니지먼트사를 통해 “힘든 경기에서 잘 이겨내 정말 기쁘다. 잘 쉬고 컨디션 관리를 잘해서 나달과의 경기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고 싶다”고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