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사의 사명은 원칙과 양심에 따라 갈등을 평화롭게 해결하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가 긍정적으로 발전하는 과정에서 갈등이 심화하고 있는데 이를 중재하는 사회적 합의와 논의가 무엇보다 중요한 시점입니다.”
김영란(63) 전 대법관이 저자로 독자 앞에 섰다. 대법원 전원합의체 판결을 통해 사법농단 이후 신뢰가 추락한 사법부에 대한 진지한 고민과 나름대로의 해법을 담은 책을 내놓으면서다. 김 전 대법관은 17일 서울 정동의 한 식당에서 ‘판결과 정의’ 출간기념 기자간담회를 열고 “재판부의 판결을 얘기할 때 따뜻한 판결과 차가운 판결은 기준이 될 수 없다”며 “당사자와 사회구성원을 최대한 설득할 수 있는 판결이 될 때 ‘좋은 판결’이라고 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최초 여성 대법관이자 청탁방지법인 이른바 ‘김영란법’을 제정한 김 전 대법관은 사법농단 사태 이후 국민들의 신뢰를 잃어버린 사법부에 대해 “판결은 정해진 법률에 근거해 내리는 것이지만 갈수록 옳고 그름을 구분하기 어려워지고 있다”며 “그렇지만 국민 대다수가 수긍하고 재판 당사자가 공감하는 판결이 나올 수 있도록 사법부는 노력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김 전 대법관은 취임 2주년을 앞둔 김명수 대법원장의 사법행정 개혁안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그는 “현직을 떠난 뒤 지금은 대법원 양형위원장을 맡고 있지만 사법부 개혁에 대해 말씀드릴 수 있는 입장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도 “늘 그랬듯 국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는 것이야말로 사법부가 앞으로 나가야 할 방향”이라고 설명했다.
김 전 대법관은 사법시험 폐지 후 도입된 로스쿨제도로 인해 사법부에 ‘금수저’ 출신 판사가 늘고 있다는 지적에 대해서도 우려를 나타냈다. 그는 “계층이동의 사다리를 걷어차서는 안 된다”며 “개천에서 용이 나오는 게 갈수록 어려워지는 사회는 발전이 없다는 데 동의한다”고 말했다.
앞서 김 전 대법관은 지난 2015년 대법관 재직 시절 판결한 내용을 다룬 ‘판결을 다시 생각한다’를 펴냈고 이번에 퇴임 이후 대법원 전원합의체 주요 판결을 모아 새로 책을 냈다. 현직에 있을 때 바라봤던 우리 사회의 갈등과 퇴임 후 한발 물러서 지켜본 모습이 크게 다르지 않다는 설명이다.
책에는 최근 대법원이 안희정 전 충남지사의 실형을 선고하면서 핵심 근거로 꼽은 ‘성인지 감수성’에 대한 이야기도 등장한다. 김 전 대법관은 “사법 선진국이라 불리는 미국도 최근에서야 성인지 감수성의 원칙이 도입되기 시작했다”며 “여성 판사가 여성에게 더 유리한 판결을 내릴 것이라는 고정관념을 버리고 법관들도 처음부터 배운다는 자세로 성인지 감수성을 공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김 전 대법관은 “우리는 무엇이 정의로운지 알고 있지만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방법을 모를 뿐”이라며 “공정한 사회를 이루기 위해 사법부가 노력한다면 우리 사회는 정의라는 목적지를 향해 제대로 전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