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동산의 탄생은 ‘디벨로퍼’의 손에서 시작된다. 적절한 부지를 고르고 골라 그 땅을 어떤 용도로 어떻게 개발할지 그림을 그린다. 이후 시공사를 선정해 건물을 짓고 분양한다. 김언식(사진) DSD삼호 회장은 명실상부한 국내 1세대 디벨로퍼다. 디벨로퍼의 길을 걸어온 지난 40년 동안 그가 공급한 주택만 해도 4만7,800여가구다. 수많은 부동산 개발업체가 사라졌지만 김 회장은 여전히 건재하며 시장을 이끌고 있다. 1세대 디벨로퍼 가운데 현재까지 생존해 있는 곳도 김 회장이 이끄는 DSD삼호 외에는 찾기 힘들다.
그는 본지와 가진 인터뷰에서 “디벨로퍼의 사명은 집값보다 더 많은 가치를 소비자에게 돌려드리는 것”이라며 “상가 공급, 택지개발 사업 등을 하지 않는 것도 이 같은 맥락의 일환”이라고 강조했다.
◇단순 ‘집 장사’로는 생존 못해=1997년 외환위기와 2008년 금융위기를 겪으면서 수많은 디벨로퍼들이 사라졌다. 지난 40년 동안 김 회장은 어떻게 생존하고 또 성장해온 것일까.
그는 “단순 집 장사, 돈벌이를 추구했던 업체들은 지금 찾아보기 힘들다”고 말했다. 이어 “현재의 나를 있게 한 것은 열심히 일하고, 의무감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일을 즐기면서 하는 것 때문”이라며 “자기가 하는 일에 즐거움을 느껴야지 돈벌이로 하는 활동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고 했다.
한 예로 그는 공공택지를 분양받아 아파트를 짓는 사업은 하지 않는다. 이유는 재미가 없어서다. 공공택지를 받아 주택을 공급하는 일을 ‘붕어빵 틀에서 똑같은 붕어빵을 찍어내는 일’에 비유했다. “땅을 직접 찾아다니다가 ‘환경이 참 좋네, 둥지를 틀 방법이 없을까’라는 생각을 하고 이를 토대로 디벨로퍼가 개발 그림을 그려야 합니다. 어떻게 보면 힘은 들고 이익이 적을 수도 있지만 하고 싶은 일을 해서 재미가 있는 거예요. 큰돈을 벌지 않더라도 즐기면서 갑니다. 일종의 도락이라고 할 수 있죠.”
김 회장은 “초기에는 공공택지 사업을 안 한 게 아니다”라며 “그런데 하다 보니 그건 디벨로퍼가 아니었다. 그냥 집 장사였다”고 했다. 이어 “부동산 개발은 그 지역의 정서를 만들어가야 하는 사업”이라며 “예술성을 가미하고 인문학적인 요소도 첨가하며 개발자의 감각과 가치관에 경제를 녹여놓은 게 바로 디벨로핑”이라고 강조했다.
김 회장이 해외 사업을 벌이지 않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미 국내에서 수십 년의 이력이 쌓인 만큼 해외에서 사업을 진행해볼 만하지만 그는 2000년대 중반 두바이 개발에 참여하려다 타의 반 자의 반으로 접은 후 해외 사업에 관심을 두고 있지 않다.
김 회장은 “해외 사업을 할 때는 지역 정서를 체화하기 힘든 어려움이 있다”며 “그렇다면 그 사업은 인문학이나 정서·가치관이 배제되고 산술을 기반으로 한 ‘딜(deal)’이나 완전한 상업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게 된다”고 했다. 그는 “아마 후대에는 해외 사업을 할 것”이라고 여지를 남기면서도 “지금으로서는 작은 규모의 개발사업이라도 예술성과 정서를 녹일 수 있는 사업이거나 또는 한화가 이라크에서 하는 것처럼 도시 자체를 개발하는 일을 하고 싶다”고 했다.
◇“상가 공급 절대 안 합니다”=김 회장의 또 다른 특징은 그가 조성하는 공간과 주택에서 살아갈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점이다. 인터뷰를 진행하는 동안에도 그는 여러 명의 이름을 언급했다. 창업 초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함께 웃고 울던 업계 관계자부터 직원들의 이름 등이다. 사람과의 관계와 인연은 김 회장의 사업에 큰 자리를 차지하고 있어 보였다. 그런 김 회장이 가장 자주 언급한 사람은 바로 소비자 또는 고객이다. 김 회장은 “모든 인간관계는 상대방에게 더 많은 득을 드려야 한다”며 “부동산 디벨로퍼의 첫 번째 소명은 소비자들이 지급한 가치보다 더 많은 가치를 돌려드리는 것”이라고 말했다.
김 회장은 실제 DSD삼호가 소비자에게 적절한 가치를 제공하지 못했다고 판단했을 때는 회사의 손해를 감수하고 이를 만회하고자 하기도 했다. 지난 1989년 주상복합법이 생겼을 때의 일이다. 그는 수원 정자동에 주상복합건물을 짓고 상가를 분양했다. 분양 몇 년 후인 1995년 김 회장은 편지 한 통을 받았다. 수원에서 분양한 가게에서 김밥집을 운영하는 여성 사장님의 편지였다. 편지에는 13세 때부터 17년간 가정부 일을 해서 모은 돈으로 분양을 받아 가게를 열었지만 상가 자체가 아무도 찾지 않는 곳이라 원금이라도 받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편지를 받고 현장을 가봤어요. 그랬더니 상가는 진작에 슬럼화됐고 길가 일부만 사람들이 찾았을 뿐입니다. 같은 단지라면 비슷한 상품성을 지닌 아파트와 달리 상가는 같은 건물이라 하더라도 음지와 양지의 격차가 너무 심하더군요. ‘내가 왜 이 짓을 했을까, 이건 아니다’ 싶었죠. 돌아오는 길에 영업 담당자에게 시간이 얼마가 걸리든 팔기 원하는 수분양자가 있으면 상가를 다시 사라고 지시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다시는 집단상가는 짓지 않습니다.”
김 회장은 그렇게 2010년 중반까지 원금에 이자까지 합쳐 상가를 다시 사들였다. 아직 비어 있는 곳이 있어 그런 곳은 DSD삼호의 창고로 사용한다고 했다. 그는 “당시 일산 식사지구 미분양 여파로 회사가 어려웠지만 두 건물의 상가를 다시 사들이는 데 적지 않은 돈을 투입했다”며 “분양받은 분들에게 고통을 드렸다는 게 얼마나 뼈저리게 후회가 됐는지 모른다”고 회고했다.
◇호흡권 가치 더 부상할 듯=일산 식사지구의 주택 공급사업도 김 회장의 아픈 손가락이다. 김 회장은 5,000가구 규모의 일산 식사지구 1차 단지를 “평생을 뒤돌아봐도 잘 만든 단지”라고 평가한다. 그런데 당시 리먼브러더스 파산 사태와 맞물려 60%의 미분양이 났다. 그는 “일산에서 이자만 5,000억원을 물고 분양만 12년을 했다”며 “훌륭한 단지를 만든다고 선후배들도 저를 믿고 이 집을 샀었는데 12년 동안 그분들에게 빚을 지고 살았다”고 말했다. 이어 “지금은 거주자들의 만족도가 높아서 그나마 다행이지만 당시는 좋은 품질, 좋은 평면의 예술적인 아파트를 만들면 소비자들의 선택을 받는다는 확신이 있었다”며 “어찌 보면 너무 교만하고 자만했던 일”이라고 되돌아봤다.
최근 공급한 단지 중 애착이 가는 아파트를 물어봤다. 그는 용인시 수지구의 ‘동천파크자이’를 꼽았다. 그러면서 ‘호흡권’을 새로운 테마로 이야기했다. 이 아파트는 공매로 나온 고등학교 부지를 인수해 조성한 단지다. 산으로 둘러싸여 조용하고 깨끗한 환경이 마음에 든다고 했다. 김 회장은 “앞으로 주택시장에서 풍경 등 조망권도 좋지만 호흡권이라는 개념이 선택의 중요한 기준이 될 것”이라며 “이미 베이징에서는 맑은 공기가 중요한 주택 선택기준이 되고 있는데 국내에서도 좋은 공기에 대한 관심이 커질 것으로 본다”고 전망했다.
김 회장은 최근 들어 주택 공급 외에 첨단산업 육성을 위한 단지 개발에도 공을 들이고 있다. 용인바이오밸리다. 과거 골프장 예정 용지를 DSD삼호가 20년 전 사두었다가 현재 바이오 기업들이 이용할 수 있는 인프라로 구축하고 있다. 김 회장은 “브라질 국립임파연구소를 유치했고, 칭화대와 서울대도 협의를 통해 유치할 계획인데, 이곳에서 바이오 스타트업들이 들어와 일하기 좋은 환경을 구축해 산업적 성과를 낼 수 있도록 돕자는 것”이라며 “벤처들이 돈이 없다면 주식을 받고 입주를 시킬 수도 있고, 일종의 바이오 스타트업 인큐베이팅을 하고자 한다”고 했다. 이어 “주택 외에 산업적 측면에서도 기여하고 싶다”며 “용인바이오밸리만 하더라도 10년은 더 투자할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오승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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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경남 창녕 △1980년 삼호건설 대표 △1995년 대한주택건설사업협회 중앙이사 △1999년 대한주택건설사업협회 경기도지회 회장 △1995년 한국프로볼링 1기 선수 △2004년 대한주택건설협회 중앙회 제5대 부회장 △2004년 DSD삼호 회장 △2008년 대한주택건설협회 중앙회 제6대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