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한 미국 대사관저가 무단침입한 대학생들에게 1시간 넘게 점거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지면서 경찰의 뒷북 대응이 도마 위에 올랐다. 한일관계 악화로 ‘반일(反日)’ 시위대에 신경 쓰다가 정작 최대 동맹국인 미국 외교 시설 경비에 허를 찔렸다는 지적이다. 국제 무대에서 갈팡질팡하는 문재인 정부 외교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것 같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20일 경찰청에 따르면 경찰은 지난 18일 한국대학생진보연합(대진연) 소속 대학생들의 주한 미국 대사관저 무단 난입 사건 직후 대사관저 안전관리와 경계태세를 강화하기로 했다. 이에 서울지방경찰청은 기존의 의경 2개 소대(약 30명) 외에 경찰관 기동대 1개 중대(약 80명)를 대사관저에 추가 배치했다. 야간 근무도 기존의 의경 2개 소대 외에 경찰관 기동대 1개 제대(약 30명)가 추가 배치된다. 경찰 관계자는 “의경과 비교해 전문성이 높은 경찰관 기동대를 현장에 배치하고 인력도 대폭 늘리면서 고정근무와 순찰근무도 강화됐다”며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도 마련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서울경찰청은 대사관저 안전과 신변보호 강화를 위해 미 대사관 측과 핫라인을 구축하고 침입 상황 발생 시 경력투입 절차를 간소화하기로 했다. 대학생들이 담을 넘는 과정에서 경찰 대응이 미흡했다는 지적이 나오자 기습시위 징후를 미리 파악할 수 있도록 내부 체계를 점검하고, 사다리·밧줄 등 담을 넘는데 쓰이는 도구를 차단하는 방안도 마련할 방침이다. 경찰은 “대사관 측과 협의해 보안시설 강화도 추진해나갈 계획”이라고 덧붙였다.
경찰이 서둘러 대책을 내놨지만 뒷북 대응이라는 비판을 피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한일 갈등으로 ‘반일 감정’이 극에 달하면서 주한 일본 공관들에 대한 경비를 일제히 강화하는 동안 미국 등 주요 외교 공관의 경비에는 소홀했던 게 아니냐는 지적이다. 최근 방위비 분담금 갈등과 대일 정책에 대한 한미 양국 이견 등으로 일부 단체들 사이에서 ‘반미’ 감정의 불씨가 되살아나고 있는 만큼 미 공관 시설에 대한 경비 강화도 좀 더 일찍 검토했어야 한다는 의미다. 더욱이 미 대사관저는 지난해 9월에도 조선족 여성이 무단 침입하는 사건이 벌어진 바 있다. 미국 대사관이 사건 직후 “14개월 만에 대사 관저에 불법 침입하는 사건이 재차 일어났다는 점을 강한 우려와 함께 주목한다”고 밝힌 이유다.
초동 대처 과정에서도 여러 문제점이 드러났다. 빈 협약에 따라 국내 대사관저는 어떠한 침입이나 손해로부터 경찰이 보호해야 하는 ‘공관지역’에 해당하지만, 대진연 소속 대학생들이 사다리를 타고 관저 돌담을 넘어 대사 가족이 거주하는 건물까지 몰려가는 동안 경찰은 적극적인 제지를 하지 않았고, 증원 요청도 뒤늦게 이뤄졌다. 또 연행 과정에서 여성 시위대와의 신체접촉을 우려해 여경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린 탓에 전원 연행하는 데는 70분이 걸렸다. 곽대경 동국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특별한 사전징후가 없어 돌발시위 예측이 쉽지 않던 상황에서 제한된 인력으로 시위대를 막기 어려운 점은 있어 보인다”면서도 “이번 일을 계기로 주요 외교 공관에 대한 경비 인력이나 예산, 시스템 등을 재점검할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서울경찰청은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공동주거침입) 등 혐의로 대진연 회원 9명에 대해 구속영장을 신청했고, 검찰이 이중 7명의 영장을 법원에 청구했다고 밝혔다. 수사팀 관계자는 “묵비권을 행사하며 진술을 거부하고 있어 배후세력이 있는지 여부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
한편 대진연은 지난 7월 윤소하 정의당 원내대표에게 협박 메시지와 흉기, 동물 사체 등을 담은 소포를 보낸 사건과 4월 나경원 자유한국당 원내대표의 의원회관 사무실을 기습 점거해 농성을 벌인 일로 논란이 된 단체다. 지난해에는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서울 방문 환영 행사를 주도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