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의 럭셔리 브랜드인 크리스찬디올이 최근 중국 ‘지도전쟁’의 희생자가 됐다. 디올은 지난 17일 공식 웨이보 계정을 통해 자사의 인사부 직원이 중국 내 채용행사에서 대만이 표시되지 않은 중국 지도를 자료로 제시한 것에 대해 사과했다. 당시 디올 직원은 중국인 참석자의 지적에 대만이 너무 작아 지도에서 보이지 않았다고 해명했다. 중국인들의 불매 위협에 시달린 디올은 “하나의 중국 원칙을 존중한다”고 밝혔다. 중국 관영 영자지 글로벌타임스는 네티즌 반응 형식으로 “중국의 영토주권을 침해하는 경우 중국 소비자를 잃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베트남은 앞서 13일부터 자국 내에서 미국 드림웍스의 애니메이션 ‘어바머너블’ 상영을 금지했다. 이 애니메이션에 중국이 남중국해의 90% 이상을 자국 영해라고 주장하는 ‘9단선’ 지도가 나오는 장면이 있다는 이유에서다. 중국이 만든 9단선 지도는 남중국해에 크게 U자 형태의 9개 선을 그어놓았다. 베트남의 남중국해 영유권을 부인하는 상징적인 선인 9단선에 대해 베트남은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일각에서는 중국의 한 기업이 이 영화제작에 참여하면서 9단선 장면이 삽입됐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중국이 시작한 ‘지도전쟁’이 전 세계로 확산하고 있다. 중국은 자국 영토라고 주장하는 남중국해와 대만, 댜오위다오(일본명 센카쿠열도) 등을 제대로 표시하지 않은 외국산 지도의 중국 반입을 금지하고 이를 사용하는 기업을 제재하고 있다. 국민들에게는 해당 기업과 국가에 대한 불매운동을 은연중에 부추기고 있다. 이런 지도전쟁 확산은 중국 인근 국가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저마다 남중국해의 일부 영유권을 주장하며 중국식 대응으로 맞서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과 거래하는 한국 기업과 한국인들의 피해도 작지 않다. 지도전쟁이 더 번지면 글로벌 경제에도 타격이 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지도전쟁의 근본 원인으로 중국 정부가 불러일으킨 ‘애국주의 운동’을 지적하고 있다. 중국에서 가장 흔히 들리는 노래인 ‘나와 나의 조국(我和我的祖國)’은 중국의 아름다움과 국가의 영원함을 묘사하는 노래인데 첫 구절이 ‘나와 나의 조국, 어느 한 부분도 나눠질 수 없다(我和我的祖國, 一刻也不能分割)’로 시작한다. 분쟁 중인 모든 영토를 중국 영토라고 전제하면서 국민들에게 영토 수호 이념을 반복 주입시키고 있는 것이다.
중국에서 본격적인 애국주의 교육이 시작된 시점은 1989년 톈안먼(천안문) 사태 이후다. 민주화 열기에 놀란 중국 공산당 정부는 일당독재 체제를 지키기 위해 ‘애국주의 교육실시 강령’을 발표하고 각급 학교에 애국교육을 강화했다. 그 결과 이후 30년간 애국주의 교육을 받은 중국인들은 국가이익 문제에 다소 광적인 집착을 하게 됐다는 분석이 나온다. 시진핑 집권과 함께 ‘중화민족의 위대한 부흥’, 이른바 ‘중국몽’을 강조하면서 애국주의에 따른 영토 주장은 폭발성이 커지며 때로는 중국 정부 자체에 부담을 안길 정도가 됐다. 중국발 지도전쟁의 포성이 본격화한 계기는 일본과 영유권 분쟁 중인 댜오위다오 사태였다. 2012년 일본이 센카쿠열도로 부르는 댜오위다오를 국유화하면서 이에 반대하는 중국과 충돌했는데 중국 세관이 일본에서 반입되는 지도에 대한 검사를 강화하면서 이 지역을 일본령으로 표시한 지도의 수입을 금지했다.
지도전쟁은 남중국해 영유권을 둘러싸고 한층 더 격렬해졌다. 2016년 네덜란드 헤이그에 있는 국제상설중재재판소(PCA)는 ‘9단선’을 핑계로 한 중국의 남중국해 영유권 주장에 대해 “이유 없다”고 판결했다. 전 세계 언론들이 이를 대서특필하면서 중국의 무리한 주장을 꼬집자 중국 정부는 반발했다. 당시 중국 인민해방군(중국군) 기관지 해방군보는 “중재 판결을 수용하지 않을 것이고 우리는 그런 각종 위협과 도전에 대응할 능력이 있다”며 “한 치의 영토도 양보하지 않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후 중국은 남중국해에 군사기지를 잇따라 확대 설치하면서 실질적인 영토화를 강화하는 것과 함께 이를 중국령으로 홍보하는 선전전의 강도도 높였다. 이후 중국에 반입되는 지도뿐만 아니라 글로벌 기업들이 사용하는 지도에서 대만이나 남중국해를 중국령으로 표시하지 않으면 제재를 가하기 시작했다.
대표적인 사례가 2017년 독일 자동차 브랜드 아우디 사건이다. 그해 3월15일 아우디가 독일에서 열린 연례 기자회견 프레젠테이션에서 중국 지도를 사용했는데 대만과 티베트의 일부가 누락돼 있었다. 이런 사실이 중국판 트위터인 웨이보를 통해 중국에 퍼지면서 아우디에 대한 비난이 쏟아졌고 결국 아우디는 공식 사과했다. 이는 중국뿐만이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중국인들의 심기를 거스르면 중국 사업이 어렵게 된다는 것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다.
이후 중국 정부와 중국 네티즌들은 지도를 많이 사용하는 항공사나 인터넷 업체, 다국적 기업들의 홈페이지를 뒤지면서 대만이나 남중국해 표시가 어떻게 돼 있는지 조사하기 시작했다. 중국 정부도 나섰다. 2017년 8월 일본의 잡화 브랜드 무인양품의 상하이법인은 금속제 옷걸이를 인터넷 사이트와 오프라인 점포에서 판매하면서 원산지를 단순히 ‘대만’으로 표기했다가 20만위안의 벌금을 부과받았다. 상하이시 공상국은 이 일본회사가 “중국의 존엄과 이익 등을 정한 중국 법률을 위반했다”고 주장했다.
이듬해 5월 중국 민용항공국(민항국)은 중국에 취항하는 외국 항공사에 공문을 보내 각 회사가 사용하는 지도에서 대만을 중국의 일부로 표시하라고 요구했다. 중국 시장이 아쉬운 대부분의 항공사는 이를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수용했는데 미국 항공사만은 달랐다. 당시 백악관은 “중국의 요구는 전체주의적 난센스”라며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기업과 시민들에게 그들의 정치적 시각을 강요하는 중국 공산당의 흐름을 비판했다”고 밝혔다.
지난해 미중 무역전쟁이 시작되면서 미국은 대만에 대한 지지를 분명히 했다. 올해 1월 존 볼턴 당시 백악관 국가안보회의 보좌관이 백악관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뒤쪽 벽면에 보이는 세계지도가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중국과 러시아를 붉은색으로 칠했는데 대만은 다른 색으로 칠한 것이다. 대만인들은 미국이 대만을 하나의 국가로 지지한다며 환호했고 중국은 침묵했다. 당시 대만 네티즌은 “중국은 이제 백악관에 대해서도 불매운동을 할 것인가”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했다.
하지만 글로벌 기업에 대한 중국의 공세는 계속됐다. 미국 의류업체인 갭은 중국 지도가 새겨진 티셔츠를 팔다가 지도에 대만이 빠졌다는 중국 네티즌의 비난에 사과해야 했고 글로벌 호텔 체인 JW매리엇, 의류 브랜드 자라 등도 비슷한 이유로 공개 사과를 했다. 최근에는 베르사체·지방시·코치 등이 홍콩·대만 표기 문제로 중국에 무릎을 꿇었다. 중국인들의 불만은 중국 당국으로도 향했는데 앞서 ‘백악관 지도’ 소동에 제대로 항의를 하지 못했다고 정부를 비난한 것이다.
지도전쟁 먹구름은 이제 전 세계로 확산하는 분위기다. 중국에 비해 절대적으로 힘이 약한 대만보다는 남중국해 영유권을 두고 중국과 다투는 동남아 국가들이 오히려 더 발끈하고 있다.
베트남 정부는 9단선 지도 삽입을 문제 삼아 애니메이션 ‘어바머너블’ 상영을 전면 금지하는 초강수를 뒀다. 호찌민시 당국은 최근 개최된 국제관광엑스포에서 9단선 지도가 있는 안내 책자를 가져온 중국 관광업체 부스를 폐쇄하고 책자를 모두 압수하기도 했다. 호찌민시 관광국은 “9단선이 표기된 여행안내 책자가 여행사 네트워크를 통해 베트남에 반입되고 있다”고 반발했다. 이러한 논란은 중국산 수입 상품에도 번졌다. 지리·중타이·베이징자동차 등 4개 중국산 차량을 수입해 베트남에 판매하고 있는 카일린사는 고객들이 차량 내비게이션 지도에 9단선이 그려졌다고 항의하자 사과하고 이를 삭제하기로 했다.
남중국해 영유권을 두고 역시 중국과 대립하고 있는 말레이시아에서도 애니메이션 ‘어바머너블’ 상영이 취소됐다. 말레이시아 당국이 9단선 장면을 삭제할 것을 드림웍스에 요구했는데 이 영화사가 수용하지 않으면서 말레이시아 전역에서 상영이 막힌 것이다. 필리핀에서도 애니메이션 ‘어바머너블’을 만든 드림웍스의 모든 영화에 대한 관람 보이콧 운동이 퍼졌다. 블룸버그통신은 말레이시아의 상영 중단을 전하며 “이 나라는 중국에 대항하기에 너무 작다”면서도 “그래도 지역의 긴장감을 완화하도록 모든 관련국에 요구하고 있다”고 말했다.
중국발 지도전쟁은 한국과도 진행형이다. 대한항공 등 항공사는 물론 많은 한국 기업들이 지도 표시 문제로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중국행 비자를 신청하는 서울의 중국비자센터에는 “비자 신청 시 ‘대만’이나 ‘홍콩’으로 쓰면 거절됩니다”라는 경고문이 붙어있다. 중국의 요구대로 ‘중국 대만’이나 ‘중국 홍콩’으로 기록하라는 것이다. 중국 내 소식통들은 대만이 별도의 색깔로 표시된 한국산 지도나 지구본은 입국 과정에서 중국 당국에 압수된다며 주의를 요구하기도 한다.
중국이 촉발한 지도전쟁이 상호주의 원칙에 위반된다는 목소리는 한층 커지고 있다. 한국과 북한을 다르게 표기한 중국산 지도나 문서는 그대로 한국 내에서 유통되는데 대만을 중국과 다르게 표기했다고 한국산 지도를 중국에서 금지한다면 불공정하다는 것이다. 같은 조건이면 한국도 중국산 지도를 막아야 한다는 주장이다. /chsm@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