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미술가 안규철의 대표작 중 하나인 ‘무명작가를 위한 다섯 개의 질문’(1991,1996)에는 2개의 문이 등장한다. ‘예술’이라고 적힌 문에는 손잡이가 5개나 달려있어 어느 것을 잡아야 할지 당황스러운 반면,‘삶’이라 적힌 문에는 손잡이가 없어 열 수조차 없다. 예술가로 사는 것의 힘겨움을 은유한 이 작품이, 다시 태어났다.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 1층에 마련된 예술전문 서점인 ‘미술책방’에서다.
◇작품 다시 보는 책방=미술책방 입구에 들어섰을 때 정면에 보이는 책장이 바로 안규철의 ‘무명작가를…’을 재(再)제작한 것이다. 더 정확히는 책방의 요청을 받은 작가가 작품을 책장으로 다시 만들었다. ‘예술(ART)’이라 적힌 오른쪽 문은 열려있으나 안쪽으로 막혔고, ‘삶(LIFE)’이라 적힌 왼쪽 문을 당기면 길이 열리는 게 아니라 벽이 튀어나온다. 예술 앞에 선 무명작가의 막막함과 관람객의 막연함을 모두 아우르는 것일까? 국립현대미술관진흥재단(이사장 윤범모)이 운영하는 미술책방은 이처럼 작가에게 의뢰해 예술이 반영된 ‘아트책장’을 제작했고, 앞으로도 꾸준히 작가와 협업한 가구를 선보일 계획이다. 안규철은 그 1호 작가다.
옛 아트존 자리를 개조한 미술책방은 국립현대미술관 50주년 문화행사에 맞춰 지난 9월 6일 문을 열었다. 기존의 대형·온라인 서점과의 차별화를 위해 예술가들의 작품을 책방 곳곳에서 보여주는 ‘다시보기’ 프로그램을 개설했다. 평면 사진으로 입체의 조각을 만드는 권오상의 ‘명시대 신선의 두상과 새들’ ‘모빌’ 등이 전시됐다. 종이 박스를 오려 영원히 죽지 않는 식물을 만든 김수연의 종이식물, 펠트로 기하학적인 오브제를 제작한 전현선의 작업 등이 ‘작품인지 아닌지 헷갈리며’ 인기를 끌었다. 이달 중순부터는 조각가 허산의 ‘부러진 기둥’이 설치되고, 디자이너 신신(신해옥,신동혁)이 책방을 거대한 책으로 느끼게 하는 창문 작업을 진행할 참이다. 다음 달에는 구민자와 킴킴갤러리가 이주여성들과 함께 한 프로젝트를 선보일 예정이다.
◇책 권하는 미술관=뉴욕현대미술관(MoMA)이나 테이트미술관, 오르세 등 세계 유수의 미술관에서 전시 못지않게 눈길을 끄는 곳이 바로 서점이지만, 그간 우리 국립현대미술관에는 전문 예술서점이 없었다. 새로 문 연 미술책방에는 미술관이 발간한 도서 150여 종을 비롯해 모마와 테이트 같은 해외 유수 미술관의 도록, 대형 서점에서도 구하기 어려운 국내외 예술 서적 등 약 1,000종이 구비됐다. 책과 관련된 저자·역자를 초청한 ‘작가와의 담담한 대화, 작담’에 소설가 박솔뫼, 영화감독 임흥순, 미술가 문경원이 참여했다. 창작가가 추천하는 책 소개 프로그램에 미술가 홍승혜, 음악가 김목인이 함께해 높은 참여율을 얻었다. 미술관 진흥재단에 따르면 책 판매량은 상반기 같은 공간의 매출과 비교해 4배 가량 상승했다. 최근 열린 ‘박서보’ 회고전 도록을 비롯해 미술관 50주년 기념전과 연계해 발간된 소설집 ‘광장’과 ‘광장’ 전시도록, 지난해 열린 ‘박이소’ 전시 도록 등이 판매 상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디지털미디어의 발달로 인쇄·출판업이 위축된 상황임에도 지난달 서울시립 북서울미술관에서 열린 예술책 전문 독립출판사들의 아트북페어 ‘언리미티드 에디션’에는 3일간 2만2,000여 명이 몰렸다. 의정부시는 최근 국내 최초로 미술전문 공공도서관을 개관했으며, 성남시 분당구 현대어린이책미술관은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 책을 주제로 한 미술전시를 꾸준히 열고 있다. 조은정 한국근현대미술사학회장은 “인터넷·인스타그램 등으로 작품을 만나는 현대인은 감각의 다원화를 경험하고 있기에 미술을 만나는 방식의 다원화도 요구된다”면서 “다양한 채널로 접하는 예술작품을 책을 통해 확인하고, 역으로 책으로 작품을 만나면 새롭게 발견하는 기쁨을 느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글·사진=조상인기자 ccsi@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