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내칼럼

[목요일 아침에] 혐오의 시대, 광장의 정치 실종되다

정민정 논설위원

맘충·알바충·한남충·꼴페미 등

익명성에 기댄 혐오표현 일상화

반대만 일삼고 비판은 수용못해

혼자 살려다 다 죽은 '공명지조'

우리 현실 얘기하는 것같아 씁쓸

정민정 논설위원



1989년 12월6일 몬트리올 폴리테크니크대에 한 남성이 걸어 들어갔다. 스물다섯 살의 이 남성은 반자동 소총으로 14명의 여성을 죽이고 14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범행 직후 자살한 범인이 남긴 유서에는 “페미니스트들은 나를 분노하게 한다”며 “남성의 자리를 차지하려 들면서 여성으로서 이점은 유지하려 한다”고 적혀 있었다. 극단적 여성 혐오가 빚은 참혹한 비극 이후 캐나다는 이날을 ‘하얀 리본의 날’로 지정, 여성을 향한 폭력과 혐오를 기억하고 근절하는 날로 삼고 있다.

최근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혐오는 전염된다: 1989년 14명의 여성을 죽인 총기 난사 사건은 어떻게 오늘에 영향을 미치는가’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30년 전 비극을 소환했다. 가디언은 “30년 전 이 사건은 과거에 안전하게 봉인된 끔찍한 기억이 아니다”라며 “2019년의 시점에서 돌아보면 미래에 닥칠 일에 대한 불운한 예감”이라고 짚었다. 불운한 예감이 엄습하는 것은 대한민국의 오늘도 마찬가지다. 요즘처럼 혐오가 삶 전반을 지배한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혐오는 우리네 일상을 좀먹고 있다.


상영 전부터 악성 댓글이 끊이지 않았던 영화 ‘82년생 김지영’을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누군가의 어머니를 ‘맘충’이라고 비아냥거리거나 어르신의 약해진 치아를 빗대 ‘틀딱’이라고 조롱하는 일은 일상사가 된 지 오래다. ‘알바충’ ‘지방충’ ‘급식충’ 등 누구든 ‘충’만 붙으면 그 즉시 혐오의 대상이라는 낙인이 찍힌다. 얼마 전에는 악플로 고통 받다 세상을 떠난 여성 연예인의 죽음을 놓고 ‘한남충’과 ‘꼴페미’로 나뉘어 누가 악플을 더 많이 달았는지 따지며 네 탓 공방을 했다고 하니 참담한 노릇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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익명성에 기댄 온라인 공간에서 벌어졌던 혐오 배틀은 급기야 오프라인으로, 그리고 정치 영역까지 침범하고야 말았다. 상대 진영에 각각 ‘좌좀(좌파좀비)’과 ‘수꼴(수구꼴통)’이라며 조롱을 일삼던 세력들이 광장에 나와 저마다 목청을 높이고 있다. 혐오의 확대 재생산이 가속화되면서 광장은 ‘민주주의의 무덤’으로 전락한 지 오래다. 시민들이 한목소리를 내며 아테네식 담론을 실천했던 ‘민주주의의 장(場)’이 각자의 세(勢)를 과시하는 싸움터로 변질된 것을 넘어 이제는 상대편을 향해 욕지기를 내뱉으며 갈등을 증폭시킨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니체는 ‘권력의 강자에 대한 약자의 반동적 원한 등 감정’을 ‘르상티망(ressentiment)’이라고 명명했다. 이성보다는 감정에 초점을 맞춘 르상티망은 자신과 다르면 무조건 적으로 간주한다. 같은 진영에 속했다는 사실만으로 강한 연대감을 느끼기 때문에 지지하면서도 왜 지지하는지 이유를 모르는 경우가 다반사다. 상대를 비판할 때에도 옳고 그름은 중요하지 않다. 단지 그가 다른 진영에 속하기 때문에 공격하는 것이다. 정치적 행위나 목적보다 반대 진영에 속한 ‘다른 편’이라는 이유로 공격의 대상이 되면서 건전한 비판 기능은 작동하지 못한다. 무조건적 비방과 극단적 혐오만이 정치가 실종된 광장 위를 안개처럼 부유할 뿐이다. “한국 정치에 데모크라시(democracy·민주주의)는 온데간데없고, 비토크라시(vetocracy·반대만을 위한 정치)만 난무하고 있다”는 국회의장의 한탄은 한국 정치의 현실을 투영하는 수사다.

최근 교수신문이 올해의 사자성어로 ‘공명지조(共命之鳥)’를 꼽았다. 불교경전에 등장하는 공명지조는 두 개의 머리가 한 몸을 갖는 일종의 운명공동체다. ‘두 머리’ 중 하나가 몸에 좋은 열매를 챙겨 먹자 다른 하나가 질투를 느껴 독과를 몰래 먹고 결국 모두 죽었다고 한다. “상대편을 이기고 혼자만 살려고 하지만 어느 한쪽이 사라지면 결국 모두가 죽게 되는 것을 모르는 한국 사회에 대한 안타까움”이라는 선정 이유가 2019년을 열흘 남짓 남긴 오늘 씁쓸한 뒷맛을 느끼게 한다.

정민정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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