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한 후 돌아오니 드론이 이름 모를 감기약을 문 앞에 놓고 갔다. 출근하기 전 변기에 설치된 센서가 내 몸의 배설물을 통해 부족한 잠재적 질병을 점검한 것이다. 센서가 파악한 정보는 집 전체에 공유된다. 집에 들어서자 보일러 온도가 올라가고, 냉장고는 인스턴트 음식을 자주 먹는 사용자의 성향을 고려해 건강식을 추천한다.
인공지능(AI)이 자리한 우리의 미래 일상이다. AI는 이미 정보기술(IT) 분야는 물론이고 의료·자동차·금융 등 전 산업 분야에 변화를 불러오고 있다. 국내외 기업들은 업종을 불문하고 AI 분야 투자에 대대적으로 나서며 본격적인 AI 시대에 대비하고 있다. 하지만 부족한 인재와 여전한 규제 탓에 국내 AI 기술 수준은 아직 다른 선진국에 미치지 못한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AI의 핵심 요소는 데이터다. 양질의 데이터가 많을수록 더 쓸모 있는 AI가 탄생한다. 예컨대 AI가 탑재된 자율주행차가 운전자를 보다 빠르고 안전하게 목적지까지 인도하려면 보다 많은 운전자의 운행 데이터가 쌓여야 한다. 수많은 데이터를 분석해 상황과 흐름을 파악해야 다음 판단이나 행동을 지연시간 없이 실행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AI가 정교해질수록 사용자는 몰리고 다시 AI가 진화하는 선순환이 이뤄진다. 주요 국가가 데이터 시장을 선점하는 데 집중하는 배경이다. 유럽연합(EU)은 지난해 개인정보보호규정(GDPR)을 통합·시행하기로 결정, 데이터 산업의 기반을 다졌다. 상업적 목적을 포함한 모든 연구에 가명 정보를 활용할 수 있게 한 것이다. 미국에는 소비자 정보를 수집해 익명화한 뒤 거래하는 ‘데이터 브로커’ 시장이 형성됐다. 일본 역시 지난 2015년 관련법을 개정해 당사자 동의 없이 제3자에게 익명 가공 정보를 제공할 수 있도록 했다.
반면 한국의 입지는 초라하다. 지난해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이 발표한 ‘빅데이터 사용 및 분석’에 따르면 생산량이 세계 5위 수준이면서도 활용 경쟁력은 조사 대상 63개국 중 31위에 불과하다. 그나마 물꼬를 트려는 시도들은 여야 갈등과 시민단체 반발에 막혀 있다. 데이터 산업의 초석을 놓을 것이라고 주목받던 ‘데이터3법(개인정보보호법·정보통신망법·신용정보법)’은 2018년 발효된 후 여전히 국회에 발목이 잡혀 있다. 데이터3법은 가명 개인정보를 활용해 새로운 기술이나 제품·서비스 개발 등에 나설 수 있게 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은 이를 두고 “‘데이터 산업은 미래 산업의 원유’라고 하는데 지금은 원유 채굴이 막힌 상황”이라고 꼬집었다.
데이터를 활용할 능력도 부족하다. 국책 연구기관인 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에 따르면 AI 핵심 인재 수준을 평가하는 AI 두뇌지수 지표에서 한국은 주요 25개국 중 19위에 그쳤다. 전문가들은 한국의 AI 인력 규모 자체도 절대적으로 부족한 수준이라고 보고 있다. 소프트웨어정책연구소는 오는 2022년까지 국내 AI 개발 인력은 현장 수요보다 9,986명이 부족할 것으로 전망했다.
정부가 최근 ‘AI 국가전략’을 통해 인프라 확충, 기술경쟁력 확보, 스타트업 육성, 일자리 안전망 구축 등 백화점식으로 과제를 내놓았지만 데이터 관련 규제 해소와 부족한 인재 충원에 우선 집중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배경이다. 서울 시내의 한 사립대학 전기전자공학부 교수는 “정부가 대학 결손 인원에 한해 AI 관련학과 정원을 늘리게 하는 등 제한적인 방식으로 산업 수요에 대응하고 있는데 수도권 대학 규제나 정원 규제를 과감하게 풀 필요가 있다”며 “인력이나 데이터 관련 규제만 해소하더라도 AI 산업의 초석을 다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김우보기자 ubo@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