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암센터가 지난해 10월 암 환자에게 수혈할 혈액(적혈구제제)이 부족해 수술 일정을 잡지 못하는 초유의 사태를 겪었다. 대한적십자사 혈액관리본부의 적정 혈액보유량이 5일분 이상인데 0~1일분으로 떨어져 비상(혈액수급위기 ‘심각’)이 걸렸기 때문이다. 지난 3일 기준 국내 적혈구제제 보유량도 평균 4.5일분(A형 3.9일분~B형 5.7일분)으로 적정 수준을 밑돈다. 지난해 같은 혈액수급위기가 언제 닥칠지 알 수 없는 노릇이다.
국내 총 헌혈실적은 2015년 308만건으로 정점을 찍은 뒤 2018년 288만건으로 6.5% 줄었다. 반면 수혈용 혈액공급량(대한적십자사 기준)은 405만유닛에서 428만유닛으로 5.7% 증가했다. 헌혈은 주는데 수혈에 쓴 혈액은 늘어난 것이다. 우리나라의 인구 1,000명당 적혈구제제 사용량이 41유닛으로 일본(26.3유닛), 호주(27유닛)의 1.5배가 넘는다는 통계도 있다.
원인은 크게 두 가지다. 우선 급속한 저출산·고령화로 단체헌혈을 많이 하는 고등학생·군인 등 10~20대 인구는 줄고 수술을 많이 받는 중년·노년인구는 늘고 있다. 무분별한 수혈을 부추겨온 정부의 정책과 의료계의 인식 부족도 문제다.
질병관리본부와 대한수혈학회가 만든 ‘수혈 가이드라인’은 수술을 앞둔 환자의 혈중 헤모글로빈 수치가 7g/㎗ 이하(정상은 13~14g/㎗)일 때 수혈을 권고한다. 하지만 의료현장에서는 아직도 10g/㎗ 이하일 때 수혈하면 된다는 오래전 관행을 따르는 곳이 많다.
그런데도 정부는 의료계의 반발 등을 우려해 가이드라인을 지키도록 유도하는 데 매우 소극적이었다. 치료 재료의 경우 의료기관이 정해진 개수를 초과해 사용하고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건강보험급여를 신청하면 초과사용분에 대해 지급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반면 혈액은 수혈량·횟수를 거의 제한하지 않는다. 정부가 나서서 적정 수혈을 권장하는 미국·호주 등과 대조적이다.
초대 대한환자혈액관리학회장을 지낸 이정재 순천향대서울병원 부원장(산부인과 교수)은 “해외에서는 암 등 다양한 수술에서 수혈을 받지 않은 환자가 수혈을 받은 환자에 비해 입원기간이 짧고 수술에 따른 감염률과 재입원율, 합병증 발생률이 훨씬 낮다는 수많은 연구 결과가 발표됐다”며 “수혈을 받지 않은 환자의 수술치료 결과가 월등하게 좋은 만큼 의료현장에서 수혈 가이드라인을 지키도록 정부가 적극 나서서 혈액 남용을 막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수술 전에는 골수를 자극해 적혈구를 많이 만들고 산소를 운반하는 헤모글로빈 수치를 올리기 위해 조혈호르몬제와 철분제를 환자에게 투여한다. 그러면 다소간 출혈이 있어도 별문제 없이 이겨낼 수 있다.
수술 중 흘린 피를 모아 필터링한 뒤 원심분리해 적혈구만 다시 넣어주는 장치(셀세이버)를 써도 다른 사람의 혈액 수혈을 최소화할 수 있다.
같은 혈액형의 피를 수혈받아도 면역거부반응으로 발열·호흡곤란·저혈압 등 다양한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다. 질병관리본부에 따르면 2017년 보고된 수혈 부작용은 2,663건에 이른다. 수혈은 면역체계에 부정적 영향을 끼치지만 이에 대한 의학적 규명은 크게 미흡한 상태다. 에이즈·간염·매독 바이러스에 오염됐거나 혈액형이 일치하지 않는 혈액을 수혈받는 사고 발생 위험도 상존한다.
위암 수술의 경우 국립암센터와 서울대병원·서울아산병원·삼성서울병원의 수혈 비율은 1% 미만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 전체 위암 수술의 수혈률은 20% 정도로 병원·의사에 따라 차이가 크다.
혈중 헤모글로빈 수치가 7g/㎗ 이하일 때 수혈하라는 가이드라인만 의료진에게 상기시켜줘도 수혈량이 24% 줄고 환자 사망률이 5.5%에서 3.3%로, 입원기간이 평균 10.1일에서 6.5일로 줄어든다는 해외 연구 결과가 많다. 대장암 환자의 대장을 절제하기 전 고용량 철분주사제를 투여한 환자의 수술 중 수혈률은 10%로 그렇지 않은 환자(39%)의 4분의1에 불과했다.
하지만 보건복지부와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안전하고 효율적인 고용량 철분주사제(500㎎ 15만~20만원)에 건강보험을 적용하지 않아 의사들이 한 유닛당 약 5만원으로 싼 적혈구제제를 쓰도록 부추기고 있다. 고용량 철분주사제는 과민반응 부작용이 25만명당 1명꼴로 매우 드물게 나타나 선진국에서 널리 쓰이고 있다. 헤모글로빈 수치는 주사 후 약 1주일부터 올라가며 체내에 저장된 철분은 수술 1~3개월 뒤까지도 유용하게 쓰인다.
그러나 우리 건강보험 당국은 가격은 싸지만 부작용 위험이 높은 편인 저용량 철분주사제에 한해, 그나마 혈중 헤모글로빈 수치가 7g/㎗ 이하이고 1차로 먹는 철분제의 효과가 없을 때 등 지나치게 까다로운 조건을 붙여 건강보험을 적용하고 있다.
제2대 환자혈액관리학회장을 지낸 김영우 국립암센터 국제암대학원대 교수는 “암 환자들은 위장관에 철분 흡수를 조절하는 물질의 수치가 많이 올라가 있어 철분제를 먹어도 효과가 크게 떨어진다”며 “수혈을 줄이려면 수술을 앞둔 빈혈 환자에게 고용량 철분주사제를 투여해 빈혈을 교정하는 게 가장 효과적인 만큼 건강보험 적용기준 개정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안전한 고용량 철분주사제는 한 번에 1,000㎎을 투여할 수 있지만 부작용 위험이 높은 저용량 철분주사제는 하루 200㎎까지만 투여할 수 있다. 500㎎ 또는 1,000㎎을 투여하려면 주사를 맞으러 병원을 각각 3회, 5회 가야 하니 매우 번거로울 수밖에 없다.
정부도 뒤늦게 혈액관리법을 개정하고 올해 수혈 적정성 평가를 도입하기로 하는 등 수혈의 안전성·적정성을 높이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적혈구제제 등 수혈용 혈액이 만성적으로 부족해진 만큼 꼭 필요한 환자에게 잘 쓰자는 취지다.
지난해 12월 개정돼 오는 12월4일 시행되는 새 혈액관리법은 큰 병원에 수혈관리위원회와 수혈관리실을 설치하고 혈액원과 함께 혈액 공급량·재고량·폐기량 정보 등의 제출 의무를 부과하는 것을 골자로 한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은 수혈 가이드라인을 잘 준수하고 있는지를 평가(수혈 적정성 평가)해 결과를 공표할 계획이다. jaelim@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