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증권업계의 이슈 가운데 하나는 코리아에셋투자증권의 코스닥 상장이었다. 국내 증권사가 주식시장에 상장한 것은 지난 2007년 이베스트투자증권 이후 무려 12년 만에 처음 있는 일이었다. 코리아에셋투자증권은 다른 증권사와 달리 홈트레이딩시스템(HTS)도, 선물거래도 취급하지 않는다. 자본 규모도 514억원(2019년 6월 말 기준)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난해 1·4분기 기준으로 27%를 웃도는 자기자본이익률(ROE)을 기록하며 증권업계 1등을 차지했다. 다른 증권사와 달리 채권·투자은행(IB)·중소기업금융 부문에 집중한 덕분이다.
코리아에셋투자증권이 이 같은 경영 전략을 택한 것은 기동호(60·사진) 대표를 필두로 하는 경영진의 철학 때문이다. 기 대표가 최근 서울 여의도 신송센터빌딩에 있는 사무실에서 서울경제와 만나 “금융 벤처기업을 꾸리고 싶다”고 말한 것은 코리아에셋투자증권의 지향점을 압축해 보여준다.
기 대표는 30년 넘게 은행·증권업에만 종사한 금융맨이다. 그러나 그의 원래 꿈은 종합상사맨이었다. 당시는 정부에서 외화 유출을 막는다는 이유로 해외여행을 규제하던 시절이었다. 그만큼 외화 획득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무역학과로 진학했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부모님의 뜻에 따라 1986년 한일은행(현 우리은행)에 일단 원서를 넣었지만 무역인의 꿈을 접을 수 없어 대우(현 포스코인터내셔널)에도 지원했다. 하지만 운명의 장난처럼 같은 날 같은 시각에 두 회사의 최종면접이 잡혀 한 곳은 포기해야 했다. 결국 부모님의 뜻을 거스르기 어려웠던 그는 은행 면접을 택했고 합격했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갔던 은행이었지만 ‘외환’을 다룰 기회는 곧바로 찾아왔다. 입사하자마자 외환전담반으로 발령이 난 것이다. 이후 그는 15년 남짓을 은행권에서 기업금융과 외국환 업무를 전담했다. 기 대표는 “수출 지원업무를 맡게 된 게 운명인 것 같다”고 웃었다.
그는 외국환 업무를 맡으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일 중 하나로 외국계 은행의 ‘꼼수’를 잡아낸 것을 꼽았다. 하루는 한 거래처로부터 해외 신용장(LC) 복사본이 왔다. 그런데 복사본에 줄이 새까맣게 나 있는 게 눈에 띄었다. 알고 보니 LC를 준 외국계 은행에서 일부러 자금청구 은행이 적혀 있는 부분을 잘라내고 붙이다 보니 줄이 생긴 것이었다. 외국계 은행이 편법을 썼던 것이다.
통상적으로는 LC를 발행한 곳과 기업이 직접 LC를 두고 협상하는 게 일반적이다. 그러나 자금을 청구할 곳이 명확하지 않다면 우리나라에 있는 외국계 은행 지점을 거쳐야 한다. 기업 입장에서 직접 협상을 하는 경우에는 9일치 이자를 외국계 은행에 내면 되지만, 외국계 은행을 거쳐야 하는 경우에는 이자를 3일치 더 지불해야 하는데다 1% 수준의 대체료도 추가로 내야 했다. 기 대표는 곧바로 이 LC를 담당하는 외국계 은행 법인장을 찾아가 “당장 금융당국에 고발하겠다”고 경고했다. 법인장도 잘못을 시인했다.
업무 능력을 인정받은 기 대표는 동화은행(현 신한은행)과 하나은행(현 KEB하나은행)을 거쳐 1998년 하나은행 광명지점장으로 부임했다. 은행권에 발을 들인 지 12년 만이었다. 하지만 기쁨보다 부담이 컸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가 터진 시기였기 때문이었다. 그는 “지점 차장들이 업무보고를 하는데 ‘부도’라는 단어밖에 없었다”고 당시 분위기를 전했다. 은행도 거래처도 모두 위기였다. 발로 뛰어다니는 게 그가 할 수 있는 일이었다.
문구류를 만드는 한 중소 거래처를 방문했을 때였다. 이 기업은 외환위기로 경영난을 맞았다. 창고엔 필기류 재고가 가득 쌓여 있었다. 기 대표는 이때 선뜻 자신이 문구류를 대신 팔아주겠다고 결정했다. 거래처 사장에게 상품소개서를 받고 기존에 인연을 갖고 있던 대기업 거래처를 돌아다녔다. 기업 입장에서 문구류는 필수 소모품일 수밖에 없다는 점에 착안했다. 기 대표가 기업소모성자재(MRO) 업무를 한 셈이었다. 그는 거래처의 제품을 모두 팔아치우는 저력을 발휘했다.
그는 2000년대 말 부국증권으로부터 영입 제안을 받으면서 ‘증권맨’으로서 전환점을 맞이했다. 그는 하나은행에서 뜻이 맞았던 동료들을 데리고 2000년 12월께 부국증권 투자은행(IB) 사업본부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2000년대 초반 초미의 관심사는 국채금리가 3% 벽을 뚫느냐 못 뚫느냐였다”며 “저금리 기조로 가면서 저축의 시대에서 투자의 시대로 바뀌고 있다고 생각해 증권사에서 새 도전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비록 처음 맡은 증권사 IB 업무였지만 은행에서 발로 뛰며 쌓은 ‘내공’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기 대표는 2001년 프라이머리 CBO(발행시장 채권시장담보부증권)를 다룰 때를 떠올렸다. 프라이머리 CBO는 신용도가 낮은 기업의 발행채권을 모은 금융상품을 뜻한다. 당시에는 외환위기로 프라이머리 CBO가 국내에서 막 붐을 일으키고 있었다. 신용등급이 떨어진 중소기업이 많아지자 신용보증기금 등 공공보증기관이 여러 기업의 회사채를 묶어 프라이머리 CBO 보증을 서주는 작업에 나서기 시작했다. 증권사 입장에서는 프라이머리 CBO 인수·판매에서 새로운 수익을 창출할 수 있었다.
그러나 프라이머리 CBO 주관사가 되려면 자본금이 3,000억원을 넘어야 했다. 기 대표는 곧바로 서울 마포 신용보증기금 지점에 찾아가 “신보가 중소기업을 위해 탄생했듯이 증권사 중에도 중소기업을 위한 증권사가 있다”며 설득했다. 결국 2001년부터 자본금이 3,000억원을 넘는 증권사와 컨소시엄을 맺으면 중소형 증권사도 프라이머리 CBO 인수·판매를 할 수 있게끔 문턱이 낮아졌다.
기 대표는 2012년 코리아RB증권을 인수하면서 새로운 도전에 뛰어들었다. “오너십을 갖고 나만의 증권사를 경영해보고 싶다”는 생각이었다. 그가 굳이 ‘전문경영인’이 되기보다 ‘오너 경영’을 지향했던 것은 “증권업계의 벤처 제조기업을 가꾸고 싶다”는 그의 목표 때문이었다.
“당시 각종 연구기관이 우리나라 증권사에 대해 ‘동질성의 함정에 빠져 있다’는 비판을 내놓곤 했어요. 같은 상품으로 같은 고객에게 같은 마케팅 방식으로 무한경쟁을 펼치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특화·전문화된 증권사를 꾸리고 싶었어요. 오너십을 갖고 있으면 길게 보고 갈 수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이후 2013년 1월25일 코리아RB증권은 코리아에셋투자증권으로 재출범했다. 출범 첫해부터 만만치 않았다. 코리아RB증권은 주식매매 위주로 사업을 이어왔다. 인수 당시인 2012년만 해도 자본잠식률이 58.8%에 달했다. ‘선택과 집중’을 하려면 결단이 필요했다.
기 대표는 그해 하반기에 자체 HTS와 선물영업을 중단하는 ‘모험’을 단행했다. 채권 인수와 대체투자(AI), 기업금융 등 특수 분야에 집중하기 위한 조치였다.기업금융·대체투자 사업을 꾸리기도 쉽지는 않았다. 전문성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트랙 레코드(사업 실적)’가 전무했기 때문이었다. 딜(거래)을 따내기 위해 미국·유럽·일본 등을 전전했다. 이 같은 노력이 드러난 대표적 사업이 펀드 플레이스먼트다. 2014년 미국 워싱턴에서 미국 연방정부가 앵커 테넌트(핵심 임차인)로 있는 3,600억원 규모 빌딩 딜을 따낸 것이다. 코리아에셋투자증권이 따낸 첫 번째 펀드 플레이스먼트 딜이었다. 당시의 거래를 발판 삼아 코리아에셋투자증권은 이듬해인 2015년 1,000억원짜리 규모 미국 델라웨어 아마존 물류창고를 국내에 소개하는 데도 성공했다. 아마존 물류창고를 국내에 소개한 것은 코리아에셋투자증권이 처음이었다. 기 대표는 “지금까지 펀드 플레이스먼트 관련 딜로 취급한 상품 규모를 모두 합치면 30억달러 수준”이라고 했다. 신기사조합·헤지펀드·모태펀드·채권운용 등 신규 사업도 순항하기 시작했다. 이에 힘입어 코리아에셋투자증권은 2014년 8월 자본잠식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시장도 어려울 때였는데 직원들 덕분에 해냈다는 자부심이 컸다”고 말했다. 이어 ROE가 10%를 넘기 시작하다가 급기야 지난해 1·4분기 기준으로 27.4%에 달하며 업계 1위를 수성했다. 그는 “지금까지 해온 대로 IB 부문을 꾸준히 강화할 것”이라며 “단순 증권 유통업이 아닌 금융 제조업을 하자는 경영 방침을 이어나가겠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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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9년 대구 △1978년 대륜고 졸업 △1986년 한국외국어대 무역학과 졸업 △1986년 한일은행 남대문지점·국제부 △1990년 동화은행 서소문지점 △1994년 하나은행 삼성센터지점 △1998년 하나은행 광명지점장 △2000년 부국증권 IB 사업본부장 △2010년 부국증권 부사장 △2013년 코리아에셋투자증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