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가 재계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기업경영에 국민연금이 개입할 수 있는 발판인 ‘5%룰 완화’와 상장사 사외이사 임기 제한 등을 담은 ‘반(反)기업법’ 시행을 강행했다. “유예기간이라도 달라”고 줄기차게 호소해온 상장사들은 당장 오는 3월 주주총회를 앞두고 깊은 시름에 빠졌다. 기업의 경영 자율성이 침해되면 결국 경쟁력도 잃을 수밖에 없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관련기사 3면
정부는 21일 정부세종청사에서 국무회의를 열어 공정거래위원회·법무부·금융위원회·보건복지부가 내놓은 ‘상법·자본시장법·국민연금법 시행령 개정안’을 의결했다. 이번 개정안의 핵심은 국민연금을 포함한 기관투자가의 주주권 행사를 확대하는 ‘지분대량보유보고제(5%룰, 주식 5% 이상 보유 시 1% 이상 변동 때 5일 이내 보고)’ 완화다. 자본시장법상 5일 이내 상세보고 대상인 활동에서 △배당 관련 주주활동 △공적 연기금 등의 기업 지배구조 개선을 위한 정관변경 추진 △회사 임원의 위법행위에 대한 상법상 권한 행사 등이 제외돼 사실상 연기금의 경영개입이 본격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또 상법상 한 회사에서 6년 이상, 같은 그룹 계열사 포함 9년 이상 사외이사로 근무한 경우 사외이사가 될 수 없다. 이번에 개정된 3개 법 시행령은 대통령 재가를 거쳐 상법·국민연금법 시행령은 공포 후 즉시, 자본시장법 시행령은 2월1일부터 시행된다. 시행령이 개정되면서 국민연금은 스튜어드십코드(기관투자가 의결권 행사 지침)를 기반으로 주주활동 강화에 적극 나설 것으로 예상된다.
주총을 불과 2개월 남짓 앞둔 경영계는 위기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국민연금이 5% 이상 지분을 보유한 상장사는 313여곳(15일 기준)에 달한다. 30대 기업 중 1곳, 50대 기업 중 3곳을 제외하고는 모든 상장사에 5%룰이 적용된다. 당장 사외이사 교체가 필요한 기업도 556곳, 대상 사외이사는 718명에 달한다. 중견·중소기업이 여기에 주로 해당해 심각한 사외이사 구인난이 불가피해졌다. 경영계는 정부가 ‘공정경제’만을 무작정 앞세워 현실을 무시한 채 시행령을 강행했다며 반발하고 있다. 특히 기업의 경영권 방어능력 무력화, 공적 연기금을 통한 정부의 경영간섭 가능성 등을 크게 우려한다. 상장사협의회 관계자는 “그간 재계의 입장을 충분히 전달해왔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이런 결정이 내려지고 말았다”며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율과 창의를 중시하는 기업경영에 정치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국민연금이 개입하는 순간 경쟁력을 상실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