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도 안 던져본 놈들이 하는 '찐'야구...'스토브리그' 현실판 백영수들

드라마 ‘스토브리그’에서 야구단 드림즈를 이끄는 백승수 단장의 동생 백영수는 데이터 분석원으로 특혜 채용됐다는 오해를 받는다. 이 일로 형은 단장을 그만둔다. 여론이 극적으로 돌아선 건 그가 한 커뮤니티에서 칼럼 ‘더위는 모든 것을 바꾼다 야구마저도’를 쓴 ‘로빈슨’이라는 게 알려지면서다. 소개된 글에서 로빈슨은 폭염이 예년 같은 시기와 비교했을 때 타자들의 장타율과 투수들의 평균자책점(ERA)을 높였다며 여름 야구 때 장타에 강한 타자들을 배치할 것을 조언하고, 결과적으로 그의 예측은 맞아떨어진다. 그는 “야구도 안 해 본 놈”이라며 분석을 믿으려 하지 않는 코치진을 설득해 선수들을 성공적으로 영입하는 등 드림즈의 재건에 힘을 보탠다.

야구 통계에 정통한 백영수의 활약은 구단에서 ‘데이터 야구’를 강조하는 최근 현실을 반영했다. 백영수가 쓴 글로 소개된 글은 야구 콘텐츠 제작 커뮤니티 ‘야구공작소(야공소)’에서 실제 원문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다. 한두 명씩 알음알음 뽑던 데이터 분석원은 국내 구단에서 15명 안팎으로 늘었다. 이중 10명이 야공소 출신으로 주목 받고 있다.

데이터 분석이란 선수의 자세, 특정 플레이 습관을 바탕으로 경기력을 분석하는 전력 분석원과 달리 승부에 영향을 미치는 다양한 변수 중 유의미한 패턴을 발견해 전략적 의사결정에 도움을 주는 것을 말한다. 이전에는 ‘공 끝이 좋다’고 투수를 직관적으로 평가했다면 공의 분당 회전수(RPM), 체공시간(FL), 릴리스 포인트(쥐고 있던 공을 마지막으로 놓는 위치) 등의 지표를 분석, 종합하는 형태다. 나아가 향후 우승 목표 수립, 트레이드나 신인 선수 선발 등 선수 자원 관리, 운영 비용 절감, 등 거시적인 의사결정에도 활용되고 있다. 데이터 분석원들이 늘어나는 건 선수 출신이 대다수를 차지하는 야구단 프런트(행정 업무를 수행하는 직원) 벽을 깨고 있다는 점에서 새롭다.

━ 의대생부터 축구분석가까지 "'하는 야구' 말고도 야구에 기여하고 싶어요"

지난달 28일 서울 동작구 사당동의 한 스터디 카페에서 열린 야구공작소의 번개 모임을 찾았다. 정기 모임이 아니었지만 한 명이 공부 주제를 제안하자 자발적으로 열 한 명이 모였다. 전체 회원 삼십 명 중 3분의 1에 달하는 인원이다. 주말이라 지하철 배차 간격이 길어 늦었다든지 흔한 변명도 없이 모두 제시간에 모여 “열어주셔서 감사합니다”라며 감사 인사를 하는 모습이 생경했다. 모인 회원들은 의대생부터 IT업체 직원, 축구 데이터분석가까지 하는 일이 천차만별이었다.

이날 모임은 KT WIZ에서 데이터 분석원으로 일하는 이희원(사진·30)씨가 열었다. 이씨는 인천 문학 구장이 자리한 동네에서 자라나 매일 야구장을 드나들며 야구 보는 눈을 키웠다. 데이터에 대한 관심으로 야공소를 만들었고 전공(고려대 가정교육학)과 달리 데이터 분석을 업으로 삼게 됐다. 그는 스토브리그(시즌이 끝난 뒤의 전력 보강 기간)를 맞아 야구 데이터를 어떻게 효과적으로 시각화할 수 있을지 노하우를 공유했다. 그가 “데이터를 아무리 정교하게 분석해도 상대가 이해하지 못하면 쓸모가 없기 때문에 중학교 1학년도 이해할 수 있게끔 데이터를 시각화하는 게 중요하다”며 수업을 연 취지를 소개하자 여기저기서 고개를 끄덕이기 시작했다.

지난해 6월 KT와 두산의 경기에서 2회 말 KT 로하스의 타격이 예시 장면으로 쓰였는데 중계 영상에서 로하스가 방망이를 휘두르기도 전에 회원들은 “이날 로하스 초구 홈런 때렸잖아”라며 알아봤다. 중간 중간 주고받는 농담마저 야구 선수, 역사, 구단 성적 등의 방대한 지식이 섞여 있어 따라 웃기가 쉽지 않았다.



이후 해당 경기의 투구 수만큼의 데이터를 가지고 구종별 구사도를 만들던 도중 발표자가 잠깐 막히자 수학 전공자인 다른 회원이 해결책을 줬다. 원하는 데이터를 뽑아내기 위해 타석에 선 타자가 좌우타자일 경우 데이터를 어떻게 분류할지에도 서로 의견을 보태며 배움의 밀도를 높였다.

━ 새로운 '머니볼'을 찾아서

야공소는 2016년 스포츠 콘텐츠 제작 단체인 비즈볼 프로젝트에서 회원 중 야구에 관심이 있는 몇몇이 모여 설립됐다. 양정웅 야공소 대표는 “야구가 좋아서 모였지만 저희가 좋아하는 건 ‘하는 야구’가 아니”라며 “‘하는 야구’ 외에도 야구 발전에 기여할 방법이 있겠다는 생각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야공소 회원들은 대학생부터 직장인까지 소속은 다양하지만 칼럼, 팟캐스트, 유튜브 콘텐츠를 제작한다. KBO 리그 투수들의 투구 간격을 계산하거나 각 구단별 외국인 선수 스카우팅 리포트를 작성하면서 재야에서 활약한다. 초창기와 달리 야공소의 문을 두드리는 사람들의 성격도 다양해졌다. 이전에는 비선수 출신으로서 야구 일을 하려면 야구 기자가 제일 가까운 접점이라고 생각했지만 이젠 데이터 분석원을 지망하는 사람들도 늘어났다.

야구 역사 덕후, 선수 덕후, 야구장 덕후 등 야구 안에서도 세분화된 관심사는 다르지만 이들을 크게 하나로 묶는 건 야구 데이터다. 데이터 분석이라는 말을 들으면 브래드 피트가 주연한 영화 ‘머니볼(2011)’을 떠올리는 게 일반적인 만큼 국내에서는 아직 생소한 분야다. 그럼에도 승부에 미치는 변수가 복잡다단하고 양적으로 데이터가 많은 야구에서 가장 빠르게 진전을 보이고 있다. 이씨는 데이터 분석원의 역할을 두고 “선수 출신인 분들은 이 선수가 어떻게 몸을 쓰는 지를 볼텐데 저희는 그 선수가 어떻게 하는 지를 보지 않고도 기록을 보고 어떻게 커리어를 쌓았는지를 보다 보니 보는 눈이 많이 다르다”며 “진료할 때도 구체적인 진단을 위해서 컴퓨터단층촬영(CT)이나 자기공명영상(MRI)을 찍는 것과 비슷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A투수가 공을 던질 때 뒤로 갈수록 힘이 약해진다고 느낀다면 이를 수치화해 한 경기에서 20개 넘는 공을 던지면 릴리스 포인트가 달라져 초반과 경기력에 차이가 생긴다고 조언해주는 형태다. 실전에서는 선수의 약점보다는 강점을, 강점을 몰랐다면 그걸 인식시키게 해주는 게 데이터 분석의 영역이라는 설명이다.

이씨처럼 많은 회원들이 처음에는 스스로의 호기심을 해결하기 위해 데이터와 씨름하고 이를 바탕으로 칼럼, 팟캐스트, 영상 등의 콘텐츠를 제작했다. 포수들의 프레이밍(Framing·볼도 스트라이크처럼 보이도록 잡는 기술)을 새로운 가치로 인정해주고 이를 잘 하는 포수가 한 시즌에 가져다 줄 승수를 분석해 소개한 것도 야공소에서였다. 이러한 자료들이 쌓이면서 구단에서도 야공소를 주목하게 됐다. 현재 SK 와이번스, 롯데 자이언츠 등 구단에 전력분석원으로 입사하는 사례가 늘어났다.

구단의 팀 주치의가 되고 싶어 연세대 의대에 진학한 오연우씨는 본과 시절 야공소를 만난 뒤 진로를 바꿨다. 그는 현재 인정받는 야구 데이터가 어느 정도 신뢰도를 가지고 있는지 밝혀내고 새로운 ‘머니볼’을 밝혀내는 게 목표다.

“머니볼을 출루율(타석에서 베이스로 타자가 얼마나 살아 나갔는지 백분율로 환산한 것)로 생각하는 경우가 많은데 모든 구단이 출루율을 따진다면 이건 더 이상 머니볼이 아니에요. 초창기 트랙맨 시스템(야구장 내 모든 플레이를 추적해 데이터를 수집하는 레이더 기반 시스템) 등 다른 구단이 주목하지 못한 경쟁적 우위에서 강점을 찾아내야 새로운 머니볼이 될 수 있어요” 그는 보건의 과정을 마치고 나면 수학과로 편입을 해 야구 통계 공부를 시작할 계획이다.



드라마 속에서는 갓 입사한 백영수가 코치진과 자유롭게 소통하며 신인 드래프트 등 의사결정에서 목소리를 낸다. 하지만 이 같은 그림을 당장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데이터 분석 결과를 가져가도 이를 받아들이는 건 감독, 코치진의 영역이다. 또한 통계 전문가들이 금융, 보험업계에서는 고급 인력으로 대우 받는 것과 달리 선수 출신 일색의 구단에서는 비주류에 가깝다. 데이터 분석 자체가 승리라는 성과와 곧바로 연결되지 않는다는 시각 때문에 데이터 분석원이 넘어야 할 벽은 있다. 하지만 현실 로빈슨들은 그저 야구가 좋다는 마음이 우선이다. 이씨는 “좋아하는 게 일이 되면 다르다고 하는데 여전히 즐겁다. 새롭게 ‘머니볼’을 발굴할 사람들이 많이 도전해서 야구를 다양한 시각에서 보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게 바람”이라며 웃었다. /정혜진·이종호기자 madein@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