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베 신조 일본 총리는 취임 한 달 후 일본의 교육을 쇄신해야 한다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내일은 제 고향이 낳은 위인, 존경하는 요시다 쇼인 선생께서 돌아가신 날입니다. 사형당하시기 전날인 1859년 오늘, 요시다 선생은 철야로 유서를 쓰셨습니다. ‘몸은 비록 무사시 벌판에 썩어가더라도 남겨놓은 것은 야마토다마시(大和魂, 일본의 혼)’.” 그는 쇼인이 남긴 이 절명시의 기개에 압도당한다고 했다. 아베 총리는 그와 쇼인의 고향인 야마구치현에 있는 쇼인신사를 때때로 참배하며 쇼인정신의 계승을 공공연히 표방한다.
이토록 아베 총리를 매료시킨 쇼인은 어떤 인물일까. 조슈번에서 1830년에 태어났으니 흥선대원군보다 열 살 어리며 이토 히로부미보다는 열한 살 많다. 매슈 페리가 나타났을 때 23세였다. 기묘하게도 페리 등장 당시 쇼인, 이토, 사카모토 료마 등 메이지 유신에서 맹활약하는 인물들이 고향을 떠나 에도에 있었다. 이 젊은이들이 모두 그 현장에 있었다는 것은 그 후 역사 전개에서 큰 의미를 갖는 우연이었다.
첫 회에서 소개한 대로 서양 놈의 목을 따서 돌아가겠다는 17세의 료마와 달리, 23세의 쇼인은 좀 더 성숙한 사람이었다. 그는 당대 최고의 양학자이자 스승이었던 사쿠마 쇼잔에 감화를 받아 유학을 결심했다. 당시 일본은 쇄국정책을 시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일본인이 해외로 나가는 것을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해외로 나간 일본인은 부산 왜관에 있던 쓰시마 사람 아니면 표류민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그의 외국행 결심이 얼마나 파천황적인 것이었는지 알 수 있다.
물론 막부나 조슈번 당국이 허가할 리 만무했다. 그는 러시아 사절 푸차친이 왔다는 소식을 듣고 다짜고짜 나가사키로 달려갔다. 그러나 배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쇼인은 이에 굴하지 않고 페리가 국서를 수리하러 다시 왔을 때 하인 한 명과 함께 조각배로 페리함대의 기함에 다가가 자신을 미국에 데려가 달라고 간청했다. 페리도 황당했을 것이다. 당시 그의 심정은 이러한 것이었다. “중국의 책을 읽고서 유럽, 아메리카의 사정을 알게 되어 오대주를 주유(周遊)하려는 마음이 생겼다. 그러나 일본은 해금(海禁)이 매우 엄격하여 외국인이 국내로 들어오는 것과 일본인이 외국에 가는 걸 모두 허용치 않는다. (중략) 절름발이가 뛰어다니는 사람을 보고 뛰어다니는 자가 말 탄 자를 보았을 때 그 부러움이 어떻겠는가. 하물며 내가 평생 뛰어다니더라도 동서 30도, 남북 20도의 바깥을 나가지 못함에랴.(투이서·投夷書)”
동서 30도, 남북 20도의 좁은 일본에 갇혀 있는 신세를 한탄하는 구절이 인상적이다. 딴 얘기지만 이 시기 사료를 읽다 보면 당시 사람들이 위도·경도에 매우 민감했다는 점을 엿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사토 노부히로는 “지금 만국의 지리를 자세히 살펴 우리 일본국의 형세를 고찰해보니 적도 북30도에서 시작하여 45도에 이르고 기후는 온화하며 토양은 비옥하니 만 가지 종류의 산물이 모두 넘쳐나지 않는 것이 없고 사방이 모두 대양에 면해 있어 바닷길의 편리함이 만국에 비할 데가 없으며 토지는 비옥하고 인물은 용감하기가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가 없다(혼동비책·混同秘策)”고 했다. 자화자찬이 귀에 거슬리나 어쨌든 위도를 인식하고 있다. 어떤 사람은 강국인 영국과 일본의 위도가 비슷하니 일본도 부강해질 것이라며 이왕이면 런던과 위도가 비슷한 캄차카에 일본의 수도를 옮기자는 주장까지 한다. 내용은 허황된 것이 많지만 어쨌든 그들이 세계지도를 손에 넣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실제로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세계지도는 널리 유포됐고 선물을 교환할 때 지구본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다시 얘기를 돌리자. 쇼인은 절박했지만 중요한 조약의 체결을 앞두고 페리가 이를 들어줄 리 없었다. 뜻을 이루지 못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막부의 오랏줄이었다. 그는 당장 조슈번의 조카마치 하기(萩)로 압송됐다. 조슈번은 사고를 친 그를 연금했지만 학생들을 가르치는 것까지 막지는 않았다. 이래서 탄생한 것이 그 유명한 쇼카손주쿠(松下村塾·송하촌숙)이다. 하기 변두리에 있던 이 조그만 서당에서 쇼인은 그 후 2년여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 공부하고 제자를 가르쳤다. 기도 다카요시, 다카스기 신사쿠(高杉晋作: 아베 신조 총리 이름의 신(晋)은 여기서 따온 것이다), 구사카 겐즈이 등 막부타도 운동의 리더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 야마가타 아리토모, 시나가와 야지로 등 메이지 정부의 수상, 대신들이 여기서 배출됐다. 지금도 이 쇼카손주쿠는 쇼인신사 경내에 보존돼 있고 그 앞에는 ‘명치유신 태동지지(明治維新胎動之地)’라는 돌비석이 서 있다. 이곳 출신 사토 에이사쿠 전 총리의 글씨다.
1858년 미국 총영사 타운센드 해리스가 쇼군 알현과 통상조약 체결을 압박하자 이에 반대하는 존왕양이론(尊王攘夷論)이 전국적으로 확산됐다. 이전에 살펴본 대로 세계정세에 밝은 막부 관리들은 더 늦기 전에 유리한 조건으로 조약을 체결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생각했지만 젊은 사무라이들의 대부분은 이를 굴욕외교라고 규탄했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 막부 로주 홋타 마사요시가 교토까지 찾아갔지만 천황의 칙허를 얻는 데 실패한 것은 지난번에 본대로다. 이에 고무돼 조약체결 반대운동은 점점 격렬해졌다. 쇼인도 그 한가운데 있었다. 이 때문에 쇼인은 지금까지도 존왕양이론의 거두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본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서양을 알아야 한다며 서양 유학까지 하려고 했던 쇼인이 무작정 서양을 때려잡자고 주장할 리는 없지 않은가. 과연 막부가 통상조약을 체결하기 직전 쇼인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쇄국은 일시적으로는 무사함을 가져다줄 수 있으나 무사안일을 꾀하는 무리가 좋아하는 것이지 원대한 계책은 아니다. 일본 내에서도 한 지방에만 있는 사람과 전국을 돌아다니는 사람은 지식이나 경험에서 큰 차이가 나게 마련인데 하물며 세계는 어떻겠는가.(중략) 영국과 프랑스 등은 소국이지만 만 리 먼바다에 걸쳐 타국을 제압하게 된 것은 모두 항해의 이점을 활용했기 때문이다.(속우론·續愚論)”
해외진출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항해술을 익혀야 했다. 쇼인은 이에 대해 구체적인 방안을 내놓고 있다. 첫째, 교토에 ‘대학교’를 세우고 거기서 항해술을 가르친다. 둘째, 무사와 공경의 젊은 인재들을 발탁해 외국선에 탑승시켜 항해술을 배우게 한다, 셋째, 젊은 청년 수십 명을 네덜란드 선박에 태워 매년 광둥, 자바, 기타 지역에 파견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항해술을 배우게 한 다음 청국·조선·인도 등지를 항해하게 한다면 수년 안에 항해술은 크게 발전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해외진출을 위해서는 또 서양사정에도 밝아야만 했다. 쇼인은 청나라 위원(魏源)의 ‘해국도지(海國圖誌)’를 읽고 나서는 “임칙서, 위원 두 사람 모두 뜻이 있는 선비로 서양서적에 정통한 사람들이다. 어떻게든 뜻있는 자들에게 서양학을 권장하여 이런 좋은 책을 쓰게 해야 한다”고 했다.(형 스기타 우메타로에게 보낸 편지)
이쯤 되면 이 사람이 정말 양이론자인가 하는 생각이 들게 된다. 조선의 양이론자 최익현이나 이항로처럼 서양문명에 맞서 중화문명을 지키겠다는 태도와는 뭔가 다르지 않은가. 양이론자라면서 서양에 가려 하고 서양언어를 배워야 한다니 이 무슨 가당치 않은 소린가 말이다. 그럼 애당초 미국과의 통상조약은 왜 반대하나. 이에 대한 그의 대답은 이렇다. “국가의 대계를 말하노니 위엄을 떨치고 만국을 제압하려고 한다면 무역과 항해가 아니고서 무엇으로 이루겠는가. 만약 쇄국하여 앉아서 적을 기다린다면 기세가 꺾이고 힘이 위축되어 망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중략) 원컨대 미국은 이번에는 물러가서 우리가 찾아가 답해줄 것을 기다리라.(중략) 나중에 우리가 직접 캘리포니아(加里蒲爾尼亞)를 방문하여 이번에 와준 사절단에 보답하고 조약을 체결할 것이다.(대책일도·對策一道)”
그는 통상 그 자체를 거부한 것이 아니라 막부가 해리스의 압력에 굴복해 일본의 국가적 체면을 손상당한 채 조약을 맺는 것에 반대한 것이다. 그는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크게 통상을 열어 선박과 물자를 늘려 수출하고 윗사람이 이를 관장한다. (중략) 상선과 상품이 점점 늘어나서 무역이 활발하게 되면 곧바로 군함을 만든다. 군함에는 반드시 총포를 갖추고 사졸을 태우며 상선이 군수품을 조달한다. 이렇게 되면 유럽, 미국도 멀다고 이르지 못할 것이 없고, 조선, 만주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재상 마스다에게 보내는 편지)
한국에서 쇼인은 흔히 정한론자로 소개된다. 물론 그는 정한을 주장한 바 있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주장 중 극히 일부분이다. 그가 살던 시대에 일본은 한국을 침략할 힘이 없었다. 그러나 당시에는 아무런 현실성 없이 정한을 주장하는 게 유행이다시피 했다. 젊은 쇼인도 그 영향을 받아 그런 주장을 했을 것이다. 이런 일본인의 망상 자체가 연구주제이기는 하다. 그러나 ‘쇼인 하면 정한론자’라고 하는 도식은 그를 매도하는 데는 좋으나 그 사상의 전모를 살펴 근대일본의 심층을 세심히 들여다보는 것을 방해한다. 적절한 비유일지 모르나 미당 서정주를 놓고 ‘친일’로 규탄하는 것을 앞세운다면 그 풍부한 한국어의 매력과 낭창한 감성은 모두 ‘살처분’될 것이다. 모든 지성은 주저와 회의에서 나온다. 규탄과 매도에 앞서 한 번 더 주저하고 인간은, 그리고 인생은 한 얼굴만 갖고 있지 않을 거라는 의심을 품고 탐색하는 것, 이것이 교양시민의 자세일 것이다.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