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에서 유래한 전문직(profession)이라는 개념은 원래 ‘신앙을 고백(profess)한다’는 종교적인 의미가 있었다. 종교의 영향력이 크던 과거에는 대중 앞에(pro) 스스로 헌신하겠다고 고백한(fess) 성직자에게 전문직이라는 말이 주로 쓰였다. 이들은 종교지식을 독점하는 대신 사회에 헌신해야 한다는 엄격한 윤리강령을 가졌다. 현대에 이르러 과학기술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은 과거의 종교만큼 커졌다. 대중이 과학기술인에게 높은 수준의 연구윤리를 기대하게 된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다.
사회 환경이 복잡해지면서 과학기술인이 직면하는 윤리적 갈등 상황도 복잡해지고 있다. 지난 1980년대 이후 국가경쟁력을 위한 산업과 대학의 협력이 늘어나면서 연구의 내용이 기업의 이해관계에 흔들리지 않기 위한 규범이 필요해졌다. 또 집단연구가 늘어나며 연구실 구성원 간 성과배분, 학생연구원 처우 등 연구실 문화와 관련한 갈등도 발생했다. 더 나아가 생명과학·인공지능(AI) 연구가 발전하면서 연구결과가 사회에 미치는 파급효과까지 고려할 필요도 생겼다. 사회가 새로운 환경에 걸맞은 연구윤리를 기대하기 시작했다.
문제는 연구윤리에 대해 과학기술계 내부에서 충분히 논의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외부에서 연구윤리의 흐름을 주도하는 모양새가 돼버린 것이다. 이제는 과학기술계가 연구윤리 확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 최근 과학기술계의 대표 단체인 한국과학기술단체총연합회가 연구개발 성과의 공정한 배분, 이해상충 회피, 사회적 책임 등의 내용을 담은 ‘연구윤리 헌장’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은 고무적인 일이다.
정부는 이러한 과학기술계의 자정능력을 신뢰하고 업계 스스로 바람직한 연구문화를 만들어갈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해줘야 한다. 연구수행 중 발생할 수 있는 연구윤리 문제에 직접 개입할 것이 아니라 연구자가 소속된 연구기관 스스로 이를 예방하고 해결할 수 있도록 기관의 역량을 키워야 한다. 다만 정부는 국가연구개발사업의 신뢰를 심각하게 훼손시킬 수 있는 위조·변조·표절에 대해서는 검증체계를 정비해 객관성을 강화하고 연구부정으로 밝혀진 경우에는 엄중히 제재해야 한다. 또 부처별(과학기술정보통신부·교육부·산업통상자원부 등) 연구윤리 규정의 상이한 점을 해소해 연구현장에 혼선이 없도록 할 필요가 있다. 아울러 연구윤리에 관한 정책이 쌍방향으로 이뤄질 수 있도록 정부와 과학기술계 간 소통창구도 마련해야 한다.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음에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히포크라테스 선서의 첫 문구다. 직업에 대한 특별한 소명의식과 숭고한 자존심이 스며들어 있다. 연구윤리 또한 직업윤리로서 과학기술인의 숭고한 자존심이 되길 희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