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 주총시즌이 시작되면서 국민연금의 기업 압박이 다시 관심을 끌고 있다. 판은 이미 확실하게 깔려 있다. 지난 2018년에 스튜어드십 코드를 도입했고 지난해 9월에는 금융위원회가 ‘5%룰’ 완화라는 선물을 줬다.
이 바탕 위에서 국민연금은 지난해 12월에 ‘적극적 주주활동 가이드라인’을 내놓았고 지난달에는 지분 5% 이상을 보유하고 있는 313개 기업 중 56개 기업에 대해 ‘단순투자’에서 ‘일반투자’로 보유 목적을 변경했다. 공시의무를 지지 않고 국민이 모르는 상태에서 마음대로 압력을 넣을 수 있는 기업을 선정한 것이다. 머리를 갸웃하게 만드는 대목은 이 명단에 포함된 기업이 삼성전자·SK하이닉스 등 주로 잘 나가는 기업이라는 사실이다. 기업을 개선해 투자수익을 높이는 것이 목적이라면 못 나가는 기업들이 주로 포함돼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다른 목적이 숨어 있다고 봐야 한다.
현 정부는 출범 초기에 그 진짜 목적을 밝힌 바 있다. ‘2018년 경제운용방향’에서 스튜어드십 코드를 재벌개혁을 통한 ‘공정경제’ 실현수단이라고 분류했다. 연금은 가입자의 돈이지 세금이 아니다. 가입자들이 ‘공정경제’를 위해 연금을 사용하라고 위임한 바도 없다. 결국 ‘공정’이라는 대중이 쉽게 받아들이는 가치를 내세워 정부가 대기업들을 마음대로 좌지우지하는 ‘연금 사회주의’에 국민연금을 동원하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이 연금 사회주의적 성격은 ‘가이드라인’에서 쉽게 드러난다. 법령 위반 ‘우려’로 주주권 침해가 예상되는 경우에도 적극 개입한다는 것이다. 법령 위반은 사법부 소관사항이다. 또 위반 ‘우려’가 있다고 처벌하지 않는다.
그런데 국민연금은 ‘우려’가 있을 때 압력을 넣겠다고 한다. 준사법기관으로서 사법부에 앞서 행동하겠다는 얘기이다. 이미 지난해 국민연금은 재판을 받고 있던 조양호 대한항공 회장을 ‘우려’만으로 회장직에서 몰아냈다. 이런 행동은 가입자가 맡긴 돈의 힘을 ‘약탈’해 자의적 권력으로 만드는 데 앞장섰다는 것이다.
국민연금의 약탈적 성격은 배당성향이 낮은 기업을 압박하는 데서도 드러난다. 주식투자자들에게 기업은 성장주·자산주·배당주 등으로 성격을 달리한다. 배당만 많이 한다고 투자수익률이 높지 않다. 배당하지 않더라도 빠르게 성장하거나 자산가치가 올라가면 주가상승으로 충분히 수익을 올린다.
국민연금은 장기투자를 기본으로 해야 하는 기관이다. 여기에는 성장주와 자산주가 더 잘 어울린다. 그런데 지금 국민연금의 개입정책은 배당주만 ‘좋은 기업’으로 낙인찍고 있다. 성장을 위해 더 투자해야 하는 기업들은 국민연금의 압력에 ‘현재 주주 포퓰리즘’을 위해 돈을 풀 수밖에 없게 된다.
이것은 미래에 연금 받을 가입자의 돈을 약탈해 현재 연금 받는 가입자에게 주는 것이다. 정치권에서는 세금을 따로 들이지 않고 선심 쓰는 일이니 좋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나 미래를 희생해 현재의 ‘표심’을 사는 매표행위가 될 수 있다.
미국에서는 이미 연금과 같은 기관투자가들의 행동주의가 기업의 이익증가나 주가상승에 좋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이해 상충만 키우는 것으로 결론 냈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아무런 논리도 실증도 없이 국민연금의 행동주의만 강화하고 있다.
경제의 활력을 위해서는 성장주를 지원하는 사회 분위기가 만들어져야 한다. 국민연금도 다음 세대를 책임지는 장기투자자로서 성장투자에 관심을 기울여야 하는 공익적 의무를 지고 있다. 그러나 지금 국민연금은 거꾸로 약탈경제·기생경제를 만드는 데 앞장서고 있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