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금을 포함해 단기금융상품 같은 현금성 자산만 2,470억달러(약 303조원)에 달하는 애플은 아이폰이나 맥북을 한 대도 팔지 않아도 492일을 버틸 수 있다. 갖고 있는 현금으로 공장을 돌리고 직원에게 임금을 주면서 1년 넘게 기업을 운영할 수 있다는 얘기다. 반면 보유현금이 2억4,000만달러인 초저가 소매업체 달러제너럴은 매출과 비용절감 없이 가까스로 4일을 견딜 수 있다. 달러제너럴 측은 “대출을 비롯해 자금조달을 손쉽게 할 수 있다”고 했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매출이 급감하고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커진 지금은 리스크가 클 수밖에 없다는 분석이 나온다.
코로나19 확산으로 기업들에도 ‘현금이 왕’인 시대가 다시 열렸다. 코로나19로 미국을 포함한 전 세계의 마이너스 성장이 예상되면서 현금이 많고 부채비율이 낮은 기업이 살아남는 데 유리하기 때문이다.
25일(현지시간) 월스트리트저널(WSJ)에 따르면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500 기업들 가운데 정보기술(IT) 업체들은 수익이나 비용절감 없이 보유한 현금성 자산만으로 약 270일(중앙값 기준)을 견딜 수 있다. 하지만 소매업체들은 최악의 상황에서 60일간 운영이 가능하다. WSJ는 “기술회사들은 재고자산이 많은 소매업체들보다 일반적으로 현금을 많이 갖고 있다”면서도 “(기업이 보유한 현금은) 갑작스러운 재정압박에 대한 준비가 얼마나 잘돼 있는지를 보여주는 척도가 될 수 있다”고 전했다.
현금성 자산이 풍부한 페이스북은 광고를 전혀 팔지 못해도 21개월 동안 서버를 돌릴 수 있다. 명품 의류업체 랄프로렌은 같은 상황에서 154일을 견딜 수 있지만 중저가 브랜드 갭은 40일밖에 유지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전자제품을 판매하는 베스트바이는 30일, 백화점 메이시스는 18일에 불과했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부활절(4월12일) 이전에 경제활동을 재개하기를 원하지만 오는 7~8월은 돼야 코로나19가 마무리 국면에 접어들 수 있다는 전망이 많다. 이를 고려하면 현금이 부족한 기업은 추가 금융지원이 없을 경우 파산으로 내몰릴 가능성이 있다. 론 그라지아노 크레디트스위스 회계·세무분석가는 “위기 때는 현금이 많은 기업이 살아남기에 유리한 위치에 있다”고 분석했다.
자사주 매입과 배당에 현금을 써버려 정작 지금과 같은 코로나19 위기상황에서 더욱 큰 위험에 노출된 곳도 많다. 정부의 구제금융을 받을 처지가 된 보잉은 지난 2년간 자사주 매입에 117억달러를 쏟아부었다. 미국의 4대 항공사는 최근 5년간 자사주 390억달러어치를 사들였다. 코로나19로 직격탄을 맞은 카지노 운영업체 라스베이거스샌즈는 지난 1년간 영업에서 창출한 현금의 99%를 배당금으로 지급했다. 최근 델타항공과 포드는 올해 배당을 중단하기로 했다.
부채가 많은 기업의 상황은 더 좋지 않다. 의약품을 만드는 카디널헬스는 부채만 400억달러에 이르고 하기스 기저귀와 크리넥스 티슈를 만드는 킴벌리클라크는 부채가 자기자본의 77배다.
코로나19 사태로 경제적 타격이 언제 마무리될지 모르는 불확실성의 시대에 현금이 최고라는 인식은 채권시장에서도 드러난다. 이날 뉴욕 채권시장에서 현금성이 강한 1개월과 3개월물 재무부 단기국채 금리는 한때 -0.05%와 -0.03%를 기록했다. 안전자산이라는 장점에 현금선호 현상이 겹치면서 단기물에 자금이 밀려들고 있는 셈이다.
/뉴욕=김영필특파원 susopa@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