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PEC+(석유수출국기구와 주요 산유국 연합체)의 감산 합의 종료로 산유국 간의 본격적인 힘겨루기가 시작됐다. 사우디아라비아와 러시아 등 일부 산유국은 이미 증산을 예고한데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한 수요 감소도 계속돼 유가는 당분간 하락세를 지속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3월31일(현지시간) 블룸버그에 따르면 지난 2월 말 뉴욕상업거래소(NYMEX)에서 배럴당 44.76달러에 거래를 마친 서부텍사스산원유(WTI)는 31일 20.48달러에 마감하며 한 달 만에 약 54% 하락했다. 최근의 급락세에도 불구하고 반등 가능성은 불투명하다. OPEC+의 감산 합의가 이날을 기점으로 종료된 만큼 산유국들이 전면적인 증산에 나서면서 추가 유가 하락을 부채질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우디는 러시아가 감산 협력을 거부한 뒤 일일 산유량을 기존 970만배럴에서 1,230만배럴로, 최대 산유 능력을 하루 1,200만배럴에서 1,300만배럴로 늘리겠다고 밝힌 상태다. 다음달부터는 하루 원유 수출량도 사상 최대 규모인 1,060만배럴로 늘릴 계획이다. 세계 8위 산유국인 아랍에미리트(UAE)도 이달부터 산유량을 하루 300만배럴에서 400만배럴로 늘리겠다고 발표했다. 러시아는 단기적으로 20만~30만배럴, 장기적으로는 50만배럴 증산이 가능하다고 밝혔다.
대다수 전문가는 지금의 저유가가 증산전쟁이 아니라 코로나19에 따른 수요 감소로 발생한 만큼 단기간에 해결되지는 않을 것으로 보고 있다. 투자은행(IB) 골드만삭스는 코로나19로 이번주 전 세계의 일일 석유 수요가 하루 2,600만배럴 감소할 것으로 추산했는데, 이는 미국과 캐나다·중미 등의 소비량을 합친 것보다 많다. 노르웨이 컨설팅 업체인 리스타드에너지는 “감산 합의가 시장의 회복을 도울 수는 있지만 석유 수요 측면에서 코로나19 격리조치는 보다 명확한 재앙이 될 것”이라고 분석했다. 블룸버그도 “코로나19에 대한 전 세계의 대응에 따른 석유 수요 감소가 사우디나 러시아의 증산 압박보다 훨씬 더 큰 문제”라고 지적했다.
다만 일각에서는 미국이 개입 의지를 밝힌 만큼 유가가 안정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본다. 전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통화하며 유가 문제 등을 논의했다. RBC캐피털의 헬리마 크로프트 글로벌원자재담당자는 영국 가디언지에 “사우디와 러시아 간 유가전쟁에서 미국의 개입은 중요한 전환점이 될 수 있다”며 “미국의 에너지 제재 조치 후퇴가 러시아를 OPEC+ 협상 테이블로 불러들이는 촉매제가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일부 전문가들은 원유 저장고가 한계에 달하고 있다는 점을 들어 유가가 바닥권에 진입했다는 평가를 내놓았다. 업계에 따르면 세계 원유 정유제품 저장탱크는 현재 75% 넘게 가동되고 있는데 산유국의 증산전쟁이 가속화하면 저장 문제가 부담이 될 수 있다.
이번 치킨게임의 결과는 산유량 5위권 이내의 메이저 국가보다 중소 산유국에 치명적인 손상을 주는 것으로 끝날 공산이 크다. 국부펀드 등으로 저유가에 버틸 준비가 된 사우디나 러시아와 달리 이라크나 이란·베네수엘라 등 산유국들은 가격 면에서 보다 취약하다. 더힐은 “이 새로운 전장의 패배자들은 OPEC의 다른 회원들”이라며 석유 수입 의존도가 높은 이들 국가의 경우 불안정이 더욱 심화할 것으로 내다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