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중견 인테리어·건자재 업체가 운영 중인 자체 연구소. 최근 이 연구소는 인력 배치를 바꿨다. 핵심은 기초기술 단계에 투입되는 연구원과 비용을 대거 줄인 것이다. 감축한 인력은 상업화 전 단계인 파일럿 테스트와 최종 사업화 단계에 분산 투입됐다. 이 업체의 한 임원은 “미래 전망이 불투명해져 장기 프로젝트에 이전보다 훨씬 신중해지고 있다”며 “당장 돈 되는 사업에 골몰하고 있다고 보면 된다”고 말했다.
1일 업계에 따르면 우리 경제의 허리 격인 중견기업을 비롯해 중소벤처기업의 연구·개발(R&D) 사업이 흔들리고 있다. 누적된 주력 산업 경쟁력 하락, 소득주도성장으로 대변되는 각종 규제 정책의 부작용에 신음하던 기업들이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라는 대형 돌발 악재마저 발생하자 R&D를 ‘축소 모드’로 바꾸고 있는 데 따른 것이다.
인테리어·건자재 업계만 해도 “복합 불황에 기업들이 신제품 출시 대신 기존 제품의 리뉴얼에만 치중한다”는 말이 나온다. 대형 업체의 한 관계자는 “가령 복합창호처럼 제품 개발까지 2~3년간 100억원 이상 들어가는 장기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기업들이 다 주저하고 있다”며 “시장이 나아지리란 믿음이 크게 약화 됐기 때문”이라고 분위기를 전했다. 실제 지난 2017년 65만호에 달했던 전국 주택 인허가 건수는 2018년 55만호, 2019년 48만호 등으로 급감했다. 이런 추세다 보니 2~3년 뒤 건설 경기도 여전히 어려울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업체들이 신제품 개발에 미온적으로 임하고 있는 것이다. 업계의 한 실무자는 “지금으로서는 수시로 변하는 시장 트렌드에 맞춰 리뉴얼된 디자인을 선보이는 것 말고는 뾰족한 수가 없다”고 말했다.
자동차 부품 쪽은 그야말로 총체적 위기다. 미래 시장에 가장 취약한 업종임에도 비즈니스 악화로 R&D는 꿈도 꾸기 힘든 형편이다. 한 중견 부품업체의 임원은 “코로나 사태 확산으로 납품 해외 완성차 공장이 많이 멈춰서 기존에 다 만들어놨던 수출 물량 계약도 취소되는 판”이라며 “돈을 벌어야 미래 준비도 하는 것 아니냐”고 답답해했다. 다른 부품 업체 관계자도 “금융권에서 매출 감소 등을 이유로 담보를 추가로 요구할 수 있다는 우려가 업계에 팽배하다”며 “상대적으로 사정이 나은 기업들도 당장 현금 확보에 주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물밑에서 기업 매각 등 구조조정 움직임이 부글거리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조병선 중견기업연구원장은 “생존경쟁에 떠밀려 사업전환을 위한 R&D 등에 소홀한 기업은 결국 사업을 접을 수밖에 없다”며 “우리 산업계에도 조만간 인수합병(M&A) 이슈가 본격화될 것”이라고 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