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위원회가 대기업 지원과 관련해 지난 2일과 3일 이틀 동안에만 4개의 참고·보완자료를 냈다. ‘대기업은 일단 유보금 등으로 시장을 통해 자금을 조달하고→안 되면 정부가 시장보다는 높은 금리로 지원을 할 수 있다→그래도 여의치 않으면 산업은행 등을 통해 자구노력을 전제로 지원 여부를 결정할 것’이 핵심이다. 설명은 길었지만 “일단 대기업은 자체 힘으로 대응하라”로 요약할 수 있다.
물론 정부의 이 같은 입장도 일리가 있다. 처음부터 정부가 관대한 지원 기조를 밝히면 너도나도 정부 지원만 받으려고 할 수 있다. 대기업은 그래도 소상공인, 중소·중견기업에 비해 먹고살 만한데 그들을 시장금리보다 우대해서 지원할 필요가 없다는 주장도 타당성이 있다. 지원에 따른 대기업 임직원의 모럴해저드(도덕적 해이) 문제도 불거질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지금이 선별적 지원을 고려할 만큼 여유롭냐는 것이다. 신세돈 숙명여대 교수(미래통합당 공동선대위원장)는 “이런 위기 국면에서는 대기업이든 중소기업이든 일단 충분히 지원해 시장을 압도하겠다는 신호부터 줘서 안정감을 이끌어야 한다”고 말했다. 신 교수는 “정부는 BBB등급 이하는 채권시장안정펀드가 아닌 회사채신속인수제로 가라고 하는 등 복잡한 이야기를 하는데, 그런 여유를 부릴 상황은 아닌 듯하다”며 “항공사 등은 이런 상황이라면 3개월을 버티지 못할 것”이라고 꼬집었다. 그는 “지난해보다 업황이 안 좋은 기업은 지원해주고 업황이 좋아진 곳은 배제하는 등 정부가 과거의 틀을 깨는 새로운 지원원칙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제언했다.
배상근 전국경제인연합회 전무도 “최근 100조원 대책이 시장의 긍정적 평가를 얻은 것은 과거 위기 때를 뛰어넘고 시장 기대를 넘어서는 규모였기 때문”이라며 “그런데 막상 집행하는 과정에서 정부가 멈칫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대기업 문제가 커지면 전후방 연관산업에서 대규모 실직이 발생할 수 있다”며 “그때 가서는 소상공인 대출 문제보다 더 심각한 사안이 될 수 있다. 호미로 막을 수 있는 문제를 가래로도 못 막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익명을 요구한 연구원장 출신의 한 대학교수는 “이런 위기 국면에서도 대기업과 중소기업을 가른 것은 결국 정치적인 고려를 한 것”이라고 봤다. 총선을 앞두고 대기업 지원에 대한 여론의 악화를 감안한 게 아니냐는 주장이다.
실제 정부는 항공사 지원과 관련해서도 소극적인 모습이다. 3일 금융위원회는 은성수 금융위원장 주재 회의 이후 “최근 어려움을 겪는 항공업 관련해서 경영현황을 면밀히 모니터링하고 있으며 주무부처인 국토교통부 등 관계부처와 협의해 필요한 조치를 점검해나가고 있다”고 밝혔다. 우리보다 코로나19 사태가 늦게 덮쳤지만 이미 500억달러(61조원) 규모의 항공업 지원안을 약속한 미국과는 온도 차가 확연하다.
업종별 종합지원의 밑그림이 없는 것도 문제다. 배 전무는 “항공은 물론 석유화학·호텔·조선업 등 업종별 지원책이 나오지 않아 정부가 불안감을 키우는 측면이 있다”고 걱정했다. 산업통상자원부는 당장 업종별 대책을 내놓을 계획은 없다는 입장이다. 산업부 고위관계자는 “현재 업종별로 생산과 내수, 수출, 공장 가동 등 현황을 비롯해 업계의 애로사항 등을 전반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있다”며 “다만 대책을 내놓더라도 상황 파악과 정확한 진단, 분석이 선결돼야 한다”고 말했다. 박철우 한국산업기술대 교수는 “현재 정부는 기간산업에 대해 ‘지원대책’이 아니라 ‘생존대책’을 내놓아도 시원찮을 상황”이라며 “금융지원은 물론 핵심산업은 국가가 긴급하게 국유화를 통해 지원하는 수준의 방안까지 마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강인수 숙명여대 교수도 “국제유가도 당분간 배럴당 50달러까지 오르기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여 저유가 장기화에 따른 석유화학·정유 업계에 대한 지원도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이태규·이지윤기자 세종=조양준기자 classic@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