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지방선거가 있기 이틀 전인 지난달 13일 엘리제궁.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굳은 표정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프랑스 전역을 휩쓸고 있는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확산과 관련한 대국민연설을 하기 위함이다. 핵심은 하나. ‘어떤 프랑스인도 절대 망하게 그냥 놔두지 않겠다’는 것이다. 국민만 거론한 것이 아니다. 기업도 ‘파산할 위기에 처하게 놔두지 않겠다’고 했다. 기업에는 세금 면제, 직원들에게는 특별 실업급여를 약속했다. 선거가 코앞임에도 27분의 연설 동안 그의 입에서는 재난지원금과 같은 단어가 한마디도 나오지 않았다. 국내의 한 경제학자는 이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그가 국민에게 준 것은 돈이 아니라 끝까지 국민을 지키겠다는 믿음일 거예요. 이런 게 리더십이죠.”
우리나라도 닷새 후면 총선이다. 코로나19의 위세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아직 안심할 수 없는 상황에서 유권자 중에는 투표장에 가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하는 이들이 상당수다. 걱정은 그뿐 아니다. 주변을 둘러보면 과연 우리 기업과 가게는 괜찮은지, 내 일자리는 밤새 안녕한지 불안해하는 이들로 가득하다. 정당과 정치인들은 4·15총선에서 이들에게 희망을 주는 메시지를 전달해야 할 사명이 있다.
현실은 거꾸로 간다. 전 가구의 70%에 재난지원금을 당정이 주기로 합의한 지 일주일도 안돼 전 가구 100% 지급을 외치는 여당이 있다. 재난지원금을 포퓰리즘이라 했던 야당은 이제 언제 그랬느냐는 듯 한술 더 떠 1인당 50만 원을 주장한다. 혼란은 온전히 국민들의 몫이다. 위성 비례정당 같은 정치공학이 판치고 엄연히 딴 당인데도 공천 과정에 서슴없이 개입하는 정치인도 있다. ‘네가 먼저 잘못했으니 내가 하는 것은 잘못이 아니다’라며 하루아침에 말을 바꾸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른 행태에 정치에 대한 ‘신뢰’는 설 자리를 잃는다.
신뢰의 상실은 또 다른 후유증을 남긴다. 선거는 ‘승복’의 과정이다. 패배한 쪽은 깨끗이 결과를 받아들이고 반성과 성찰의 기회를 삼으며 승자는 새로운 추동력을 얻는다. 이번 총선에서는 여당이 승리해도 코로나19 탓에 정권심판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얘기가 떠돌 수 있다. 야당이 이긴다면 ‘꼼수’와 ‘변칙’의 승리라는 비판에 직면할지 모른다. 거부의 시대, 대립의 시대다.
이번 총선은 이전과 다르다. 앞으로 4년은 코로나 이후 시대에 대응해야 하는 시기다. 코로나19 이후의 세상은 그 이전과 분명 다를 것이다. 그냥 변하는 게 아니라 기존 질서를 송두리째 바꿀 대변혁이 될 것이라는 경고가 사방에서 들린다.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일자리를 잃었고 상당수 중소기업과 소상공인들이 벼랑 끝에 서 있다. 살아남은 대기업과 몰락하는 중소·소상공인의 간극은 더 커지고 자가격리 사회는 유통구조와 근무환경의 대변혁을 초래해 노동시장을 뒤흔들 게 뻔하다. 외환 위기와 글로벌 금융위기에 거치며 벌어질 대로 벌어진 양극화가 다시 우리 사회를 짓누를 가능성도 있다. 정치·세대 갈등에 계층 갈등이라는 전염병까지 한꺼번에 창궐할 태세다.
위기만은 아닐 수도 있다. 고용의 변화는 노동시장에서 기득권을 몰아낼 수 있는 기회다. 청년들의 위기는 외환위기 때처럼 모험정신 가득한 스타트업 전성시대를 만들 수 있다. 산업계에 몰아칠 구조조정의 태풍은 한계·좀비기업의 정리와 산업 구조조정의 전환점이다. 단 전제조건이 있다. 정치가 뒷받침이 돼야 한다. 양극화를 완화하고 경제·사회의 대변혁을 이끌 동량이 나와야 한다. 국민의 신뢰를 잃은 정치인은 할 수 없는 일이다.
영국의 역사가이자 정치가인 허버트 A.L 피셔는 그의 역저 ‘유럽의 역사’에서 ‘정치란 국민을 행복하게 하는 기술’이라고 했다. 이런 정치가 거저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이 땅의 민주주의가 처절한 투쟁을 거쳐 이뤄졌듯이 포스트 코로나 시대를 위한 정치도 유권자들의 치열한 선택으로 쟁취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