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정여울의 언어정담] 두 번째 화살이 더 아프다

작가

고통 받는 사람에게 더 무서운 것은

내아픔 공감해 주지 않는 타인의 외면

"당신은 상처로 인해 망가지지 않았다"

말해주고 손 잡아주는 따스함 필요

정여울 작가정여울 작가



세상에서 내 아픔을 가장 잘 이해해줄 것 같은 존재가 내게 등을 돌린다면 그 아픔을 견뎌낼 수 있을까. 트라우마는 ‘첫 번째 충격’보다 ‘두 번째 충격’일 때 더 큰 파괴력으로 생을 무너뜨린다. 두 번째 충격의 본질은 첫 번째 충격으로 인한 아픔을 누구도 이해 못 하거나 공감해 주지 않을 때 발생한다. 사람들은 고통받는 사람 곁에 머물면 마치 자신도 고통에 감염되기라도 할 것처럼 고통으로부터 멀어지려 한다. 상처보다 더 무서운 것은 가장 가까운 타인의 외면이다. 우리가 한사코 외면하기에 결코 돌볼 수 없는 타인의 상처는 멀리 있지 않다.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존재를 향해서도 그 ‘외면’의 권력은 작동할 수 있다. 애써 외면하지 않아도 고통을 반복하는 것이 너무 아픈 일이라 자신도 모르게 고통받는 사람에게서 서서히 멀어질 수 있다.



키이라 나이틀리 주연의 영화 ‘애프터 워’에서는 바로 그 ‘외면’ 때문에 서로를 더욱 아프게 하는 부부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의 폭격으로 11살짜리 아들 마이클을 잃은 주인공 레이첼은 남편까지 잃어버릴까 봐 전전긍긍한다. 영국군 장교인 남편 루이스는 전쟁 후 폐허가 된 함부르크를 재건하는 사업을 맡았지만, 아내의 무너진 삶을 재건해주는 데는 무관심해 보인다. 레이첼 입장에서는 집 밖으로만 맴도는 남편의 무심함이 못내 서운하다. 아이를 잃은 엄마 곁에 있어 주지 않는 남편, 아들 이야기를 꺼내는 것조차 꺼리는 남편을 바라보며 아내는 절망한다. 레이첼은 밤마다 혼자 울다 마침내 고백한다. 당신은 나만큼 슬프지 않은 것 같다고. 당신은 나처럼 아프지 않은 것 같다고. 극심한 고립감에 빠진 레이첼은 급기야 자신을 이해해주는 독일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그러나 내내 아내의 입장에서 남편을 야속하게 비추던 영화의 카메라는 그제야, 이야기의 끝에 이르러서야 남편의 남모를 아픔에 초점을 맞춘다. 아내가 짐을 싸서 떠나려 하자, 남편은 고백한다. 당신을 보면 아이가 생각나고, 당신을 껴안으면 당신에게서 아들의 냄새가 났다고. 남편은 그제야 마음을 터놓으며, 당신이 나를 떠나도 당신은 영원히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일 거라고 고백한다. 아내가 남편을 떠난 순간. 아내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아들의 낡은 스웨터를 보자 남편의 슬픔이 폭발한다. 아내가 다른 남자와 떠나버릴 결심을 하자, 그제야 자신이 돌봐주지 않은 아내의 상처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마침내 서로를 향한 간절한 구원의 메시지를 읽었다면, 그들에게는 아직 희망이 있는 것이다. 이렇듯 들리지 않는 타인의 목소리를 마침내 들리게 만드는 것, 두 번째 화살에 고통받는 사람들의 아픔을 담는 것이 이야기의 힘, 스토리텔링의 힘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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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받는 사람들이 더 깊은 상처를 받는 것은 ‘내가 이렇게 아파해도 누구도 내 아픔을 이해해주지 못한다’는 생각 때문이다. 우리는 아파하는 이들을 향해 ‘당신은 상처 입었지만, 망가지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해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당신은 상처받았지만, 그 상처로 인해 완전히 무너지지 않았음을 알려주는 일은 중요하다. 아직 당신의 심장은 생생하게 고동치고 있다고, 아직 더 많은 눈부신 나날들이 남아 있다고 말해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너무 고통스러워 ‘과연 내가 살아있는 것인지’ 믿을 수 없는 사람에게 다가가 ‘당신은 결코 사라지지 않았다’고, 여전히 우리는 함께 이 세상에 살아있다고 알려주는 것. 그것이 이야기의 힘, 글쓰기의 힘이다. 공감은 여기가 끝이라고 느껴지는 순간을 버티는 마지막 지지대다. 벼랑 끝에 선 존재의 절망을 그린다는 것. 그것은 지칠 줄 모르는 공감의 힘으로, 굴하지 않는 연대의 힘으로 고통받는 당신의 손을 꼭 잡아주는 따스함이다. 당신이 아무리 우울한 순간에도, 당신의 존재가 그 어느 곳에서도 인정받지 못하는 순간에도, 쿵쾅쿵쾅, 당신의 심장은 분명 뛰고 있다. 우리에게는 살아있음을 느낄 수 있는 심장이, 아파하는 사람들의 손을 잡아줄 따스함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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