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들어 상장사들의 전환사채(CB)·신주인수권부사채(BW)·교환사채(EB) 등 메자닌 채권의 전환·행사·권리가격을 재산정하는 ‘리픽싱’이 지난해보다 두 배 가까이 늘어난 것으로 집계됐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으로 인해 각 기업의 주가가 급락한 데 따른 것이다.
최근 들어 증시가 일부 회복했지만 업계에선 리픽싱 급증이 주가하락 뇌관이 될 수 있다는 우려를 내놓고 있다. 주식 전환가격을 낮추면 그만큼 메자닌 채권 투자자들이 주식으로 바꿀 수 있는 수량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19일 한국거래소에 따르면 올해 들어 상장사들은 지난 17일까지 총 551건의 전환가격 및 주식인수가격 조정 공시를 냈다. 이는 지난해(333건)에 비해 65.4%나 늘어난 수치다. 특히 코스닥 상장사들의 관련 공시가 크게 늘었다. 올 들어 코스닥 시장에서 리픽싱 공시 건수는 총 446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 265건에 비해 두 배 가까이 늘었다. 지난 해 역시 2018년(191건) 대비 급증한 바 있다. 코스닥 시장에선 유가증권시장 상장사에 비해 회사채 발행이나 자금 차입이 어려운 중소·벤처기업이 다수 몰려 있어 비교적 투자자를 쉽게 끌어들일 수 있는 메자닌 채권 물량이 많은 편이다.
유가증권시장도 예외는 아니다. 올해 현재까지 유가증권시장 내 리픽싱 공시 건수는 총 105건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68건) 대비는 물론이고 2018년(39건), 2017년(42건)에 비해서도 훌쩍 늘었다.
코로나19 사태로 주가가 대폭 내려가다 보니 전환가격을 조정할 수 밖에 없는 기업이 많아지고 있다. 리픽싱 조항은 CB의 전환가격이나 BW의 주식 인수가격을 낮춰 메자닌 채권 투자자의 손실을 최소화할 수 있도록 해준다. 리픽싱이 없다면 주가 폭락 시 메자닌 채권 투자자들은 실제 주가보다 훨씬 높은 가격에 주식을 인수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상장사들은 메자닌 채권 발행 당시의 30% 이내에서 전환·행사·교환가격을 재산정하고 있다.
문제는 리픽싱이 많아질수록 ‘오버행(주식 대기물량)’ 문제가 커질 수 있다는 점이다. 전환·행사·교환가액이 낮아진 만큼 메자닌 투자자들이 권리를 행사할 수 있는 주식 수도 많아지기 때문이다. 과도한 리픽싱이 기존 주주들의 지분 가치를 떨어뜨릴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오는 배경이다. 더구나 이번 코로나19 사태가 아니더라도 리픽싱 건수는 꾸준히 늘어나는 추세다. 자본시장연구원에 따르면 이미 지난 2018년 코스닥 기업의 리픽싱 공시 건수는 1,000건을 넘어섰다.
이처럼 리픽싱이 활성화된 곳은 우리나라와 일본을 제외하면 드물다는 해석이다. 김필규 자본시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우리 시장에선 CB 발행 기업들의 신용등급이 낮은 편인데다 외국에 비해 위험 선호 투자자들의 폭이 좁은 편”이라며 “이러다 보니 메자닌 투자를 촉진하는 측면에서 (국내에서) 리픽싱 시스템이 도입됐다고 봐야 한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리픽싱 횟수 제한 등 규제책이 필요하다는 제언을 내놓고 있다. 다만 당장 규제를 도입했다가는 가뜩이나 코로나19로 부진을 겪고 있는 중소·벤처기업 자금조달 시장이 더욱 침체될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리픽싱 조항을 ‘안전장치’ 삼아 메자닌 채권에 투자하는 투자자들이 많기 때문이다. 김 선임연구위원은 “장기적으로 메자닌 채권 규제를 도입할 필요가 있다고 보이나, 최근 (자금조달) 시장이 좋지 않다 보니 당장은 규제보다 ‘어떻게 이 시장의 붕괴를 막느냐’가 중요한 이슈인 것 같다”고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