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오늘의 경제소사] 전쟁 직전 통과된 한은법

1950년 독자 중앙銀시스템 구축

한은법 통과 뒤 1950년 6월5일 열린 최초의 금융통화위원회. /한국은행한은법 통과 뒤 1950년 6월5일 열린 최초의 금융통화위원회. /한국은행



1950년 4월21일 서울 중앙청(옛 조선총독부 건물) 중앙홀, 개헌 국회 82차 본회의가 한국은행법 등 5개 법안을 전광석화처럼 통과시켰다. 한은법 표결 결과는 찬성 78 대 반대 6. 재적 의원 198명 중 102명이 참석한 결과다. 별다른 토론 없이 통과됐어도 한은법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막판에는 ‘야당 대표들이 남파 간첩과 공모해 정부를 전복하려 획책했다’는 선거전 북풍 공작인 ‘대한정치공작대 사건’의 주모자가 이승만 대통령의 비서 출신으로 드러나 공방을 펼치느라 경제법안이 끼어들 틈도 없었다.


더욱이 5월 말 총선을 앞둔 의원들의 마음도 콩밭에 가 있었다. 국회 참석보다 지역구 선거 운동에 바빴다. 한은법도 의원들의 이석으로 과반이 흔들리자 사회를 맡던 윤치영 부의장이 서둘러 표결에 부쳐 어렵사리 통과됐다. 표결에서는 찬성이 압도했으나 한은법이 마련되기까지는 세 차례의 대결 국면을 거쳤다. 첫째는 조흥은행의 도전. 민족자본을 내세운데다 미 군정청의 재무국장(육군 중령)과의 친분을 무기로 적산관리대행을 맡은 데 이어 신생 대한민국의 중앙은행 지위까지 노렸다.

관련기사



남한의 재정과 금융을 한 손에 쥐고 있던 군정 재무국장이 갈린 뒤 경쟁 대열에서 탈락한 조흥은행을 대신해 떠오른 강자는 조선식산은행. 조선인 행원의 비율이 높았던 식산은행은 미 군정이 주도한 조선환금은행 설립부터 조선은행을 제쳤다. 정부 수립 후 재무부 요직인 이재국장 자리를 차지한 식산은행은 중앙은행까지 넘봤으나 무게 추는 차츰 조선은행으로 넘어왔다. 이름과 달리 해외 영업망이 많았을 뿐 국내 기반은 크지 않았던 조선은행은 정부가 초빙한 미국 뉴욕 연방준비은행 국제수지과장으로 재직 중인 아서 블룸필드 박사에게 배우며 법안을 가다듬었다.

한은법 제정의 마지막 고비는 재무부. 한은을 재무부 산하 ‘화폐청’으로 만들고 은행감독권을 직접 행사한다는 독자적 한은법을 만들었다. 법제처에서도 심사를 지연시키는 등 이런저런 방해가 들어왔다. 결국 조선은행은 숱한 고비를 넘어 한은법 통과에 성공하며 한국은행으로 탈바꿈, 중앙은행으로 자리 잡았다. 독립적인 중앙은행을 갖게 된 가장 큰 비결은 인력. 블룸필드 박사는 훗날 말레이시아 등 많은 후진국에서 컨설팅을 맡았으나 장기영 조사부장(서울경제신문·한국일보 창립자) 등 한국인들의 열의와 근면은 어디서도 볼 수 없었다고 회고했다. 한은법 제정을 통해 한국은 독자적인 중앙은행 시스템을 갖췄으나 의문은 남는다. 한은이 소심한 기득권에 안주하지 않았는지, 통화가치의 수호자로 제 역할을 다해 왔는지.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

권홍우 논설위원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