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방에서 병원을 운영하는 A씨는 20대 초반인 자녀 명의로 광고대행·부동산 법인을 설립했다. 그런 다음 자신의 병원 광고를 맡긴다는 명목으로 수십억원의 광고료를 지급했다. 그러나 법인은 실제 광고를 하지 않았고, 받은 돈으로 서울 강남에 20억원대 고가 아파트를 구매했다. 아파트에는 현재 A씨 자녀가 거주하고 있다.
정보통신(IT) 회사를 설립해 큰돈을 벌게 된 B씨는 회사 자금을 빼돌리고 세금신고를 누락했다. 본인 명의로 아파트를 사면 자금출처가 드러날 것을 걱정한 B씨는 법인을 세워 빼돌린 자금을 이전했다. 그는 법인 명의로 구입한 한강변 40억원대 아파트에서 10억원대 고급외제차를 타며 호화 생활을 누렸다.
최근 상업용 부동산이 아닌 주거용 부동산을 구매하는 법인이 급증하면서 이같이 편법 증여나 규제 회피 수단으로 악용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법인의 아파트 매수세는 통계에서 잘 드러난다. 한국감정원에 따르면 지난 3월 전국 법인 아파트 매입은 총 6,658건으로 월 기준 통계 작성 이래 최대 수치를 기록했다. 전체 아파트 거래에서 법인이 차지하는 비중도 3월 8.4%로 전달(5.4%) 대비 3%포인트 증가했다. 고가주택이 몰려 있는 ‘강남 4구(서초·강남·송파·강동구)’에서도 최근 코로나 쇼크 등으로 전체 아파트 매매거래 건수는 크게 줄어든 반면 법인 거래가 차지하는 비중은 지난 3월 3.9%로 증가했다. 지난 1월(1.5%), 2월(2.3%)과 비교하면 확연히 늘어난 수치다.
하지만 일부 법인 거래에서 규제 허점을 파고든 사례가 적발되면서 과세당국이 나섰다. 23일 국세청은 1인 주주인 법인(2,969개)과 가족법인(3,785개) 등 6,754곳을 대상으로 전수 검증에 착수했다고 밝혔다. 특히 고가 아파트를 사들이는 법인을 주목하고 있다. 국세청은 해당 법인을 대상으로 편법 증여 여부, 구입 자금 출처와 자금 형성 과정에서 세금 납부 여부 등을 확인할 계획이다. 부동산 법인이 보유 아파트를 매각한 경우에는 법인세, 주주 배당소득세 등 관련 세금을 성실하게 납부했는지도 철저하게 검증한다는 방침이다.
A씨와 B씨처럼 부동산 법인 검증 과정에서 고의적 탈루 혐의가 발견된 27개 법인 대표자에 대해서는 이미 세무조사에 착수했다. 이들은 자녀에게 고가 아파트를 편법 증여하거나 다주택자에 대한 투기규제를 피하기 위해 법인을 세운 것으로 조사됐다. 또 자금출처조사를 받지 않기 위해 법인을 만들거나 기획부동산을 차린 경우도 있었다. 국세청은 세무조사 대상인 법인의 경우 대표와 가족은 물론이고, 부동산 구입 과정에 자금을 편법 제공한 사업체까지 조사 대상에 포함하는 등 강도 높은 조사를 예고했다. 차명계좌를 이용하거나 이면계약서를 작성하는 등 고의적으로 세금 포탈했다고 판단되면 수사기관에 고발한다는 방침이다. 임광현 국세청 조사국장은 “앞으로 부동산 법인을 가장해 투기규제를 회피하는 모든 편법 거래와 탈루행위에 대해 철저히 검사하겠다”며 “부동산 법인을 설립한다고 해서 세원관리 사각지대에 놓이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엄격하게 관리될 것”이라고 말했다.
/세종=조지원 권혁준기자 j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