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기 2549년 부처님오신날이었던 2005년 5월 15일 저녁. 서울 성북동 길상사에서 법정 스님(2010년 열반)을 비롯해 불교 신자 3,000여 명이 모여 축하 음악회를 열었다. ‘사랑과 화합을’ 위한 음악회인 만큼 이웃 종교 인사들도 길상사를 찾아왔다.
그들 중에서도 특히 반가운 손님이 있었다. 김수환(2009년 선종) 추기경이었다. 김 추기경이 모습을 드러내자 커다란 박수 소리가 경내를 가득 채웠다. 김 추기경은 “천주교 신자를 대표해 이 자리를 마련해준 길상사 측에 감사 드린다”며 부드러운 미소로 인사했다. 앞서 1997년 12월 길상사가 개원하던 날 법당까지 들어와 불교 신자들을 위한 축사를 했던 그가 또 한 번 종교 간 화합을 몸소 실천한 것이다.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불기 2564년 부처님오신날인 2020년 4월 30일. 이제 김 추기경도, 법정 스님도 우리 곁을 떠난 지 오래지만 모든 종교의 공통 지향점은 사랑과 화합이라는 그들의 가르침은 불변이다.
그리고 그 가르침을 실천하려는 사람들의 노력 덕에 반목과 증오 대신 서로 사랑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되새겨볼 것을 권유하는 영화 한 편이 때맞춰 우리 곁에 찾아 왔다. 영화 ‘저 산 너머’다.
■기적 같은 도움 덕에 탄생한 소박한 영화
영화는 ‘거룩한 바보’로 불렸던 김 추기경의 어린 시절을 따뜻한 시선으로 그린 최종태 감독의 신작이다. 앞서 최 감독은 이문식·이준기 주연의 ‘플라이대디(2006)’, 주현·예수정 주연의 ‘해로(2011)’ 등을 연출했다. 그는 ‘해로’ 덕에 2012년 대종상 신인 감독상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그 즈음 최 감독은 동화작가 정채봉의 ‘저 산 너머(원제 바보 별님)’를 우연히 읽었고, 김 추기경의 어린 시절과 시대 배경에 완전히 매료됐다. 영화 감독답게 당연히 영화로 만들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종교인을 주인공으로 한 영화가 성공한 사례가 사실상 전무 했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투자자와 배우를 찾는 일이 너무 힘들었다. 마음 속에만 희망을 품고 있다가 김 추기경 선종 10주기를 1년 앞둔 2018년, 다시 한번 영화로 만들어 보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어려움은 여전했다. 그러나 한번 찾아온 기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최 감독이 지난 20일 서울 용산 CGV 시사회 당시 ‘친구’라고 소개한 배우 안내상이 출연을 결정해주면서 배우 섭외가 쉬워졌다. 무엇보다 7년 넘게 애 태웠던 제작·배급 비용이 갑자기 마련됐다. 감사한 마음이 얼마나 컸던지 최 감독은 언론 시사회에서 투자자를 직접 소개하기도 했다.
■불자 투자자 “부처님도 영화 위해 비켜주시더라”
최 감독에게 연출의 날개를 달아준 투자자는 남상원(63) 아이디앤플래닝그룹 대표다. 남 대표는 스스로 “영화를 잘 보지 않던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알고 지내던 백장현 한신대 교수가 그를 최 감독과 연결해줬다. 남 대표는 “먼저 ‘저 산 너머’ 책을 읽었고, 책을 보고 바로 결정했다”며 “영화에 투자를 안 하면 평생 후회 할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40억원이 넘는 투자비 전액을 책임지기로 했다.
신앙심에 힘입어 그런 결정을 했나 싶지만 남 대표는 천주교가 아닌 불교 신자다. 그는 “김 추기경은 종교인이라기 보다는 이 시대의 성인 같은 분”이라며 “지금 (세상이) 메마르고 각박한데 그런 분이 계셨다는 자체가 큰 위안”이라고 말했다. 김 추기경에 대한 존경심이 투자 결정의 핵심 요인이었다는 설명이다.
남 대표는 “영화 개봉일이 부처님오신날인데, 코로나 때문에 부처님오신날 행사가 한 달 뒤로 미뤄졌다”며 “부처님도 영화를 위해 비켜주신 것”이라고 웃었다.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이렇듯 감독도, 투자자도 한번에 반했다는 어린 수환이는 어떤 아이였을까. 그리고 어린 수환의 주변 환경은 어떠했을까. 영화 속 일곱 살 수환이는 가난한 8남매 집안의 순한 막둥이다. 위인전에 흔히 나오는 어린 시절 비범한 모습은 딱히 보이지 않는다. 한국 최초의 추기경이니 왠지 어릴 때부터 후광이 비쳤던 건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그래도 심성이 참 고운 아이다. 아픈 아버지 걱정에 나중에 커서 인삼장수가 돼야겠다고 생각하고, 어머니와 시장에 쪼그리고 앉아 국화빵을 팔면서도 건너편 다른 국화빵 장수 사정을 걱정한다. 학교에서 오해를 받아도 친구 마음이 다칠까봐 그냥 침묵을 택한다.
무엇보다 수환의 가족은 다른 사람이나 환경을 탓하는 법이 없다. 특히 어머니는 아무리 힘들어도 좌절하지 않는다. 이해할 수 없는 일로 가득한 세상이지만 모든 게 하느님의 계획이라면서 아들 앞에서 미소 짓는다. 되려 어린 자식의 마음을 하느님 대신 자신이 차지하는 게 아닌지 걱정한다.
기도하는 어머니의 마음을 먼저 읽은 형이 사제의 길을 택하고, 수환 역시 시골 마을 ‘저 산 너머’에 있는 신앙의 세계를 꿈 꾼다. 영화 속 인물들은 삶이 아무리 어려워도 분노하고 원망하기보다는 서로 끝까지 믿고 사랑하는 것이다. 이는 2009년 김 추기경이 선종 직전 남겼던 유언을 떠올리게 한다. “고맙습니다. 서로 사랑하세요.” 종교를 넘어 시대를 초월해 모든 이에게 필요한 메시지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