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진출을 추진하던 한국 중소기업 A사가 미국 아웃도어 대기업인 컬럼비아스포츠웨어의 소송에 발목이 잡혔다. 양사는 7년 전 한국에서 특허소송으로 악연이 시작된 후 미국에서도 특허분쟁을 이어갔다. 결국 지난해 컬럼비아는 A사를 상대로 2,000억원대의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것으로 확인됐다. 콜롬비아의 소송이 이어지면서 A사는 해외 진출을 포기한 것은 물론 특수 패브릭 사업을 접고 주력업종을 바이오케미컬로 전환했다.
21일 관련업계에 따르면 A사는 지난해 미국 오리건주 포틀랜드 지방법원에서 컬럼비아로부터 2,000억원이 넘는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당했다. 이례적인 점은 컬럼비아가 소송의 근거를 조직범죄 피해자 보상법인 리코(RICO·Racketeer Influenced and Corrupt Organizations Act) 위반이라고 주장한 것이다.
한 외국계 법무법인 특허전문 변호사는 “리코는 지난 1970년대 미국에서 주로 조직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만든 법”이라며 “특허무효심판을 제기했다고 해서 리코를 근거로 천문학적인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은 이례적”이라고 밝혔다. 그는 이어 “이번 소송은 미국의 비싼 소송비용을 무기로 미국 대기업이 한국 중기를 압박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7년에 걸친 A사와 콜롬비아와의 악연
A사와 컬럼비아스포츠웨어의 악연은 7년 전인 지난 201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컬럼비아는 2013년 초 A사가 개발한 체열반사소재 메가히트RX가 출시되자 자사의 옴니히트 특허를 침해했다며 경고장을 발송했다. A사는 즉각 한국 특허심판원에 무효심판을 제기했고 2014년 12월 대법원 승소 판결을 받아낸다. 당시 업계에서는 ‘한국의 중소기업이 미국의 골리앗을 이겼다’는 평가를 내놓을 정도로 이례적이었다는 반응이 나왔다. A사의 치밀하고 체계적인 특허기술 대응전략이 주목을 받기도 했다.
그러나 양사의 특허분쟁은 이게 끝이 아니었다. 컬럼비아는 대법원 판결 바로 다음달인 2015년 1월 미국에서 A사의 고객사인 세리어스가 같은 기술로 미국 특허를 침해했다고 오리건주 지방법원에 소송을 걸었다. 이 소송 이후 A사는 미국 고객을 대거 잃고 실적도 크게 악화됐다. A사는 2014년까지 흑자를 기록했지만 2015년부터 적자로 돌아섰으며 2018년까지 4년 연속 영업손실을 기록했다.
실적이 큰 타격을 입자 A사는 2017년 미국 특허심판원에 컬럼비아를 상대로 특허무효심판을 제기했지만 기각됐다. 특허무효심판이 진행되려면 해당 소송으로 이익을 볼 수 있는 세리어스도 함께해야 했다. 하지만 세리어스는 컬럼비아와 기존에 진행 중인 특허소송 때문에 참여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미국 심판법상 관련 특허소송이 제기된 지 1년이 지나면 무효심판을 낼 수 없는데 세리어스는 이미 2015년부터 컬럼비아와 특허소송을 진행하고 있었다. 세리어스는 지난해 11월 실용특허소송에서 최종 승소했다.
하지만 컬럼비아와 A사의 갈등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컬럼비아는 세리어스와 A사가 특허무효심판을 제기한 것을 문제 삼아 리코(RICO·Racketeer Influenced and Corrupt Organizations Act)를 근거로 A사에 소송을 걸었다. 리코는 1970년대 조직범죄에 대한 피해를 보상하기 위해 제정된 법이다. 미 법무부가 1999년 주요 담배회사들이 흡연의 유해성에 대해 대중을 기만했다며 리코법 위반 혐의로 소송을 제기한 사건이 대표적이다. 다만 컬럼비아와 A사의 사례처럼 특허분쟁이 리코 소송으로 번지는 경우는 극히 이례적이다. 조직범죄를 다루는 리코법을 이용해 소송 상대방에게 타격을 주기 위한 것이라는 해석까지 나온다.
이와 관련해 컬럼비아는 이번 소송은 2014년 한국에서 진행된 옴니히트 특허소송 결과와는 관련이 없다는 입장이다. 컬럼비아 측은 서울경제에 “한국에서 진행된 특허소송 결과는 컬럼비아가 미국 등 다른 나라에서 가진 특허권리에는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고 밝혔다. 이어 “A사가 미국에서 제기한 특허무효심판 진행 과정에서 변론 전 증거조사제도(Discovery) 절차를 통해 세리어스와 A사의 은밀한 거래가 있었음을 확인했다”며 “세리어스가 자사를 대신해 A사가 특허무효심판을 제기하게 하고 법률비용을 지급했다는 증거를 발견했는데 이는 사기, 공모, RICO 위반에 해당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본지가 확보한 특허무효심판(IPR) 결정문에 따르면 A사는 세리어스와의 독점계약이 정당한 비즈니스 계약이라고 주장했고 법원은 컬럼비아나 A사 어느 한쪽의 주장에 명확하게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IPR은 결정문에서 컬럼비아는 세리어스와 A사 간의 계약에 관해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찾고자 했지만 증거 부족 등으로 결론을 내지 않았다며 불리한 추론을 적용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특허괴물 공격 방식과 판박이
컬럼비아의 대응방식은 특허괴물(NPE·Non Practicing Entity)이 삼성전자나 LG전자와 같은 한국 대기업들에 특허소송을 거는 전략과 판박이다. 특허괴물은 대기업에 고의적으로 특허소송을 걸어 합의를 이끌어낸 뒤 거액을 챙긴다. 컬럼비아 역시 미국에서 거액의 소송을 걸고 변호사 비용이 많이 들어가는 등 대응이 어려운 점을 악용해 한국의 중소기업 A사를 압박하고 있다.
A사는 컬럼비아의 리코 관련 소송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 오리건주에서 변호사를 선임했으나 최근 현지 법무법인으로부터 계약 해지 통보를 받았다. A사가 한 달에 수억원에 달하는 변호사 비용을 제때 지불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A사는 지난해 매출 145억원, 영업이익은 6억원 수준으로 매달 수억원의 변호사 비용을 감당하기는 부담스러운 상황이다.
A사 관계자는 “수년간 적자 상태가 지속돼 변호사 비용을 낼 여력이 없는 상황”이라며 “비용 문제로 이미 한 차례 법무법인을 변경했지만 지금도 마찬가지로 미국 쪽 소송이다 보니 일단은 무대응하기로 방침을 정한 상황”이라고 밝혔다. 다만 A사가 컬럼비아가 제기한 소송에 대응하지 않더라도 미국 재판부가 조기 패소 판결(default judgment)을 내리고 컬럼비아가 한국에서 판결 확정 소송을 걸어 A사를 압박할 수 있다.
국내 법조계 및 특허 업계에서는 컬럼비아의 대응방식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우선 특허무효심판을 제기했다고 천문학적인 규모의 리코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것 자체가 극히 이례적이다. 게다가 이미 결론이 난 특허무효심판을 두고 제기한 소송이기 때문이다. 소송을 받아준 미국 현지 판사가 부인이 컬럼비아로부터 기부금을 받은 것이 밝혀져 최근 사임한 것도 논란이다.
한 중소기업 최고재무책임자(CFO)는 “컬럼비아가 미국 기업이다 보니 아무래도 국내 기업이 현지 법원에서 대응하기에는 불리한 측면이 있다”며 “중소기업은 앞으로 특허분쟁이 이 같은 대규모 소송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철저하게 대비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전담조직 둔 서울반도체, 바이오니아…특허분쟁에 백전백승
# 지난 1980년대 국내 최초로 퍼스널컴퓨터를 생산한 삼보컴퓨터는 저가정책을 앞세워 미국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 삼보컴퓨터는 미국에서 100만대 이상을 판매하며 한때 시장점유율 19%를 차지할 정도로 위세를 떨쳤으나 2000년대 초 휴렛팩커드(HP)와의 특허소송에서 패하면서 무너졌다. 특허 침해 판결과 사용금지 명령을 받아 제품 판매를 금지당했기 때문이다.
# 디지털캐스트는 1997년 세계 최초로 MP3플레이어 원천기술을 확보했으나 부실한 특허전략으로 특허전쟁에서 패한 후 시장에서 퇴출됐다. 원천기술을 보호하기 위해서는 치밀한 특허전략이 필요한데 디지털캐스트는 단 3건의 특허만 확보해 촘촘한 특허 포트폴리오 구축에 실패했기 때문이다. 국내에서는 경쟁업체들의 유사제품 출시와 특허무효소송으로 권리범위가 축소됐으며 해외 특허는 미국 특허괴물에 인수되면서 수조원에 달하는 시장을 놓쳤다.
삼보컴퓨터와 디지털캐스트의 사례에서 볼 수 있듯이 지식재산권인 특허는 기업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을 정도로 중요한 문제다. 국가 경제 기여도도 크다. 지식재산권은 특히 스타트업 성장의 필수조건으로 꼽힌다. 전미경제연구소에 따르면 스타트업은 최초 특허 등록 후 5년간 평균 고용이 54.5% 증가했다. 매출액은 79.5%, 3년 이내 벤처캐피털(VC) 투자 확률은 47%, 특허담보대출 확률은 76% 증가했다.
MIT 이노베이션 이니셔티브에 따르면 스타트업의 성장 가능성은 특허 보유 시 미보유 대비 35배 증가하고 창업 후 1년 내 상표권 등록 시 미등록 대비 5배 증가했다. 스타트업이나 중소중견기업이 기술 확보만큼이나 특허 관리에도 신경을 써야 하는 이유다.
삼보컴퓨터와 디지털캐스트는 특허 관리 실패로 쓴맛을 봤지만 서울반도체와 바이오니아는 중소·중견기업임에도 특허전담조직을 꾸리는 등 지식재산권에 대한 투자를 통해 미국·일본 기업과의 특허분쟁에서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다. 특허청 관계자는 “중소·중견기업이 글로벌 강소기업으로 성장하려면 연구개발(R&D) 초기 단계부터 면밀하게 전 세계 특허를 분석해야 한다”며 “해외기업 특허를 회피·무력화할 수 있는 전략적인 연구로 특허분쟁을 사전에 예방해야 고부가가치 핵심·원천특허를 창출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탐사기획팀=고병기기자 staytomorro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