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 기업

낡은 건물들 사이로 힙한 카페...반세기 시공간 뛰어넘은 '서울의 브루클린'

[고병기기자의 진화하는 도시 이야기]

■과거, 현재, 미래가 공존하는 성수

철물점·인쇄소·수제화 공장으로 쓰였던 오래된 붉은벽돌 건물 그대로 남아있어

2010년께부턴 하나둘 식당 등으로 탈바꿈...연예기획사·대기업 매장도 속속 둥지틀어

느리면서도 빠른 상반된 도시풍경 공존...성수동을 더욱 매력적인 곳으로 만들어

2011년 문을 연 대림창고. 과거 정미소와 물류창고로 사용되던 건물을 복합문화공간으로 개조했다.  /고병기기자2011년 문을 연 대림창고. 과거 정미소와 물류창고로 사용되던 건물을 복합문화공간으로 개조했다. /고병기기자






성수동에는 두 개의 지하철 노선이 지난다. 서울 동서남북을 1시간30분 동안 느리게 도는 순환선 지하철 2호선이 성수역과 뚝섬역을 지나고, 강남과 분당을 30분 만에 연결시켜주는 신분당선이 서울숲역을 지난다. 아주 느린, 그리고 아주 빠르게 성수동을 지나는 지하철 노선의 차이만큼이나 성수동은 최소 50년 이상의 시공간을 뛰어넘은 듯한 서로 다른 풍경들이 뒤죽박죽 섞여 있다. 성수동이 형성될 때부터 자리를 잡았던 자동차정비소, 철물점, 수제화 가게 등이 있고 그런 낡은 건물과 골목 사이사이로 오래된 공장을 개조한 멋진 카페와 식당 등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뒤이어 뉴욕 맨해튼의 센트럴파크를 연상시키는 서울숲 옆으로는 고가의 고층 주거시설들이 최근 들어서고 있다. 서울에서 몇 안 되는 근대산업 유산을 간직하고 있을 정도로 시간이 느리게 흘러가는 성수동은 이제 한편으로는 가장 빠르게 변하는 곳이 됐다. 가장 빠르면서도 가장 느린 곳, 과거·현재, 그리고 미래가 공존하는 부조화스러운 풍경은 성수동을 서울에서 가장 매력적인 공간으로 만들고 있다.

성수동에는 유난히 붉은 벽돌 건물이 많다. 서울시와 성동구는 2018년 서울숲 북쪽 일대를 붉은 벽돌 마을 시범 사업지로 선정했다.   /고병기기자성수동에는 유난히 붉은 벽돌 건물이 많다. 서울시와 성동구는 2018년 서울숲 북쪽 일대를 붉은 벽돌 마을 시범 사업지로 선정했다. /고병기기자


물류창고를 재활용한 대림창고. 높은 층고가 시원한 느낌을 준다. /고병기기자물류창고를 재활용한 대림창고. 높은 층고가 시원한 느낌을 준다. /고병기기자


오래된 건물을 그대로 재활용한 성수동 카페 어니언 /고병기기자오래된 건물을 그대로 재활용한 성수동 카페 어니언 /고병기기자


성수동이 주목받기 시작한 시기는 지난 2010년께다. 2011년 과거 물류창고로 쓰이던 건물을 개조한 ‘대림창고’, 2014년 인쇄공장을 리모델링한 ‘자그마치’ 등이 문을 열면서 성수동의 변화를 주도했다. 성수동 토박이로 성수동에서 5개의 식당을 운영하고 있는 이남곤 33테이블 대표는 “당시에는 의외였다. 도저히 카페가 들어설 자리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1960년대 서울시 도시계획에 따라 준공업지역으로 지정된 성수동은 오랫동안 젊은이들의 발길이 쉽게 닿지 않는 공장지대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오히려 준공업지역에서만 볼 수 있는 높은 층고, 붉은 벽돌 건물이 사람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적인 요소가 됐다. 전 세계적으로 25조원이 넘는 부동산에 투자한 홍콩계 자산운용사 거캐피털의 굿윈 거 회장은 3년 전 인터뷰에서 성수동을 “미학적으로 창의성을 이끌어낼 수 있는 공간”이라고 표현하기도 했다. 실제 성수동은 폐공장을 힙한 공간으로 탈바꿈시킨 뉴욕의 브루클린이나 런던의 이스트런던과 비교되고는 한다. 특히 성수동은 한때 빠르게 타올랐다가 금방 식어버린 삼청동이나 익선동·가로수길 등과 달리 사람들이 계속 몰려들면서 변화에 속도가 붙고 있다. 성수동에서 부동산 개발 컨설팅을 하고 있는 박관수 다원플러스 대표는 “2015년만 하더라도 3.3㎡당 3,000만원 정도이던 토지 가격이 현재는 6,000만원에서 1억원까지 2~3배 오르는 등 성수동에 대한 관심이 갈수록 뜨거워지고 있다”고 말했다. 초창기 성수역을 중심으로 생겨나던 힙한 카페들도 최근 피혁가게와 철물점들이 들어선 연무장길, 서울숲 인근으로까지 확산되는 추세다.

성수동에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한 풍경이 곳곳에 남아 있다. /고병기기자성수동에는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간 듯한 풍경이 곳곳에 남아 있다. /고병기기자


수제화 거리는 성수동의 상징 중 하나다. 지금도 성수동이라고 하면 수제화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고병기기자수제화 거리는 성수동의 상징 중 하나다. 지금도 성수동이라고 하면 수제화를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많다. /고병기기자


성수동의 특징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로 ‘접근성’이다. 영등포·가산동 등의 여타 준공업지역과 달리 성수동에 사람들이 몰리고 빠르게 변하고 있는 이유는 바로 좋은 접근성에 있다. 영등포와 가산동이 서울 서쪽에 치우쳐 있는 것과 달리 성수동은 서울 한복판에 자리 잡고 있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 덕분에 대중교통을 이용하면 성수동에서 강남이나 도심까지 30분밖에 걸리지 않는다. 2012년에는 서울숲역이 개통해 접근성이 더 좋아졌다. 강남과의 접근성은 강남의 비싼 임대료에 부담을 느낀 연예기획사들을 성수동으로 끌어들였고 쿠팡과 같은 e커머스 회사들도 물류창고를 성수동에 두고 있다. 교통의 요지이다 보니 지식산업센터 분양도 인기를 끌었다. 2007년에 분양한 ‘서울숲 코오롱 디지털타워 1차’의 경우 30분 만에 분양이 끝났다. 또 2008년 이후 분양된 지식산업센터 26개 중 미분양된 곳은 하나밖에 없을 정도다. 박관수 다원플러스 대표는 “최근에는 현대자동차그룹이 삼성동에 글로벌비즈니스센터(GBC)를 지으면서 2·3차 벤더들이 강남과 가깝고 상대적으로 부동산 가격이 저렴한 성수동에서 사무실을 찾기 시작했다”고 전했다. 지식산업센터가 몰리면서 성수동의 풍경도 크게 달라지고 있다. 붉은 벽돌 공장이 있던 자리에 회색의 지식산업센터가 들어오면서 화이트칼라 인구의 유입이 크게 늘어났기 때문이다.

서울숲역 2번 출구 앞에 위치한 지식산업센터. 이 지식산업센터는 2016년 분양 당시 평당 분양가가 900만원대였으나 현재는 두배로 올랐다. /고병기기자서울숲역 2번 출구 앞에 위치한 지식산업센터. 이 지식산업센터는 2016년 분양 당시 평당 분양가가 900만원대였으나 현재는 두배로 올랐다. /고병기기자


이커머스 업체 쿠팡의 물류창고. 성수동은 서울 어디로든 이동하기 쉬워 물류창고 입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고병기기자이커머스 업체 쿠팡의 물류창고. 성수동은 서울 어디로든 이동하기 쉬워 물류창고 입지로도 각광받고 있다. /고병기기자


지난 10여년간 상전벽해라는 말이 과하지 않을 정도로 많은 변화를 겪은 성수동이지만 변화는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 최근 들어 대기업, 외국계 투자가, 스타트업 등 점점 더 다양한 성격의 자본들이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대기업 중에서는 2008년 12월 이마트가 처음으로 성수동으로 본사를 이전했으며 지난해 말에는 메가박스 본사가 서울숲 인근에 자리를 잡았다. 또 아모레퍼시픽은 지난해 성수동의 오래된 자동차 정비소를 개조해 체험형 매장 ‘아모레 성수’를 열었다. 외국계 투자가들도 성수동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성수동 부동산중개 업계에 따르면 최근 홍콩계 투자가가 성수역 인근 3개 부지를 매입했다. 또 부동산 디벨로퍼인 네오밸류는 뚝섬역 사거리 인근에 위치한 임블리 소유의 땅을 매입해 처음으로 성수동에 진출했다. 또한 조수용 카카오 공동대표가 한남동에 선보인 복합문화공간 ‘사운즈한남’ 두번째 프로젝트가 성수동에 들어설 것이라는 얘기도 나오고 있다. 아울러 무신사·젠틀몬스터 등 최근 밀레니얼 세대로부터 각광을 받고 있는 브랜드들도 성수동에 땅을 매입해 성수동으로 터전을 옮기고 있다. 한국 진출을 노리는 해외 브랜드들 역시 강남 대신 성수동을 택하고 있다. 블루보틀이 지난해 성수동에 한국 1호점을 연 것이 대표적이다. 또 헤이그라운드·플레이스캠프·패스트파이브 등 주로 강남을 중심으로 확장하던 공유 오피스들도 최근 성수동에 속속 몰려들고 있다. 이러한 다양한 성격의 자본들은 앞으로 성수동을 보다 다채로운 모습으로 탈바꿈시킬 것으로 예상된다.

작년 말에 성수동으로 터를 옮긴 메가박스 본사 /고병기기자작년 말에 성수동으로 터를 옮긴 메가박스 본사 /고병기기자


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모친인 우란 박계희 워커힐미술관 관장의 이름을 따 설립한 우란문화재단의 성수동 사옥. 공장지대인 성수동의 특색을 반영해 설계했다. /고병기기자최태원 SK그룹 회장이 모친인 우란 박계희 워커힐미술관 관장의 이름을 따 설립한 우란문화재단의 성수동 사옥. 공장지대인 성수동의 특색을 반영해 설계했다. /고병기기자


성수동에서 가장 부족한 요소로 꼽혔던 고급 주거시설들도 잇따라 들어서고 있다. 대림산업이 2017년 7월 당시 역대 최고가에 분양한 ‘아크로 서울포레스트’가 내년 상반기 입주를 앞두고 있으며 서울숲 인근 강변북로와 접해 있는 성수전략정비구역 사업도 최근 다시 속도를 내고 있다. 오는 3월2일 정비구역 일몰제 적용을 앞두고 그동안 사업 추진에 발목을 잡았던 제2지구 추진위원회가 19일 조합 창립총회를 열고 조합설립인가를 신청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예정대로 개발이 진행되면 한강변에 최고 50층, 8,500여가구의 대규모 고급 주거단지가 들어서게 된다. 앞서 갤러리아포레와 트리마제 등 고급 주거시설에 연예인들이 몰려들면서 성수동이 주목을 받았던 것처럼 향후 고급 주거시설이 들어오면 성수동에 대한 관심은 더 높아질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성수전략정비구역의 경우 전체 면적의 3분의1이 녹지로 개발될 예정이어서 인근 서울숲과 함께 성수동의 매력을 한 단계 높여줄 것으로 기대된다.

대림산업이 2017년 7월 당시 역대 최고가에 분양한 ‘아크로 서울포레스트’. 고급 주거 시설이 하나둘씩 들어서면서 성수동의 또 다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고병기기자대림산업이 2017년 7월 당시 역대 최고가에 분양한 ‘아크로 서울포레스트’. 고급 주거 시설이 하나둘씩 들어서면서 성수동의 또 다른 풍경을 만들어내고 있다. /고병기기자


낙관적인 전망만 있는 것은 아니다. 대규모 자본이 한꺼번에 몰리면서 젠트리피케이션 현상이 심화되고 이로 인해 성수동이 가진 매력이 빠르게 사라질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성수동은 지금 기로에 서 있는지도 모르겠다. 성수동의 시간이 조금은 느리게 흘러갔으면 하는 이유다.






고병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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