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의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SMIC가 올해 설비투자액을 기존 전망치 대비 34% 늘리며 공격적 점유율 확장 전략에 나선다. 대만 TSMC가 미국의 압박으로 ‘탈(脫) 중국’ 행보를 보이고 있어 화웨이의 자회사 하이실리콘 등 중국내 팹리스(반도체 설계전문)를 공략하기 위한 SMIC 측의 복안이다.
15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SMIC는 올 1·4분기 실적을 공개하는 자리에서 “올해 설비투자액(CAPEX)으로 43억 달러를 집행하겠다”고 밝혔다. 이는 기존 전망치 대비 11억 달러 늘어난 수치다. SMIC의 1·4분기 매출은 미국의 반도체 장비 수출 제한 등 각종 어려움 속에서도 자국 팹리스의 안정적 물량 확보로 전년 동기 대비 35% 늘어난 9억500만 달러를 기록했다.
SMIC가 현재 주력인 14나노 공정을 7나노 공정으로 ‘퀀텀점프’ 하기위해서는 막대한 투자가 필수다. SMIC가 올 연말께 7나노 공정의 반도체 양산에 성공할 경우 올해 5나노 공정 제품을 내놓을 TSMC·삼성전자(005930) 등 선두업체와의 기술격차가 2년 이내로 좁혀진다.
미국 제재로 네덜란드 ASML이 단독 생산하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도입 제한 등의 변수가 있긴 하지만 애플이나 퀄컴 등의 일부 하이엔드 제품을 제외하고는 7나노 공정만으로도 일반 반도체 양산에 문제가 없다. 실제 SMIC의 웨이퍼 1개당 반도체 수익은 1,560달러로 TSMC(3,338달러)나 삼성전자(2,490달러)와 격차가 크긴 하지만 반도체 시장 점유율 4.5%로 글로벌 5위 입지를 유지하고 있다.
업계에서는 SMIC의 이 같은 공격적 투자 배경으로 화웨이의 지원을 꼽고 있다. SMIC는 글로벌 2위 스마트폰 업체인 화웨이로부터 14나노급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기린 710A’를 주문받아 양산에 나서는 등 수익 구조가 점차 안정화 되고 있다. 미국 제재로 대만 TSMC와의 협업이 어려워진 화웨이가 자국 파운드리 이용을 늘릴 가능성이 높다는 점도 SMIC 측에 호재다. 올 1·4분기 SMIC의 매출에서 중국 업체들이 차지하는 비중도 전년 동기(53.9%) 대비 대폭 늘어난 61.6%를 기록하는 등 중국 반도체 생태계에서 SMIC의 역할이 커지고 있다.
SMIC가 홍콩과 뉴욕 시장에 상장돼 있고 올 초 6억 달러 규모의 회사채를 발행하긴 했지만 지난해 매출액(31억1,600만달러)을 훨씬 웃도는 금액을 올해 설비투자에 쏟아붓는다는 점에서 중국 정부의 자금 지원설도 나온다. SMIC는 본사인 상하이를 비롯해 중국 내에 9개 공장을 운영 중이며 각 공장이 자리한 지방정부로 부터 상당규모의 보조금 및 세제 혜택을 받는 것으로 전해졌다.
중국 정부 입장에서도 SMIC의 향후 성장세는 ‘반도체 굴기’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는 팹리스와 파운드리의 ‘2인 3각’ 체제로 돌아가는데 미국이 글로벌 1위 파운드리 업체인 TSMC가 화웨이 등 중국 업체 물량을 수주하지 못하도록 압박하고 있어 자국 파운드리 육성의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다. 중국은 팹리스 분야에서는 세계 정상급인 하이실리콘을 보유한 만큼 SMIC의 기술력도 세계 정상 수준으로 끌어 올려야 반도체 굴기가 가능한 셈이다. 메모리 반도체의 경우 D램 시장에서는 CXMT가 연내 17나노급 D램을 양산 예정인 것으로 알려졌으며 YMTC는 128단 낸드플래시 제품을 올 연말께 양산한다는 계획이라 조금씩 성과가 나고 있다.
한편 TSMC는 120억달러를 들여 미국 애리조나주에 5나노 공정 기반의 반도체 양산이 가능한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한다고 이날 밝혔다. 공장 건설 작업은 내년에 시작하며 2024년 가동이 목표다. 약 1,600개의 일자리 창출이 가능할 전망이다.
이번 TSMC의 파운드리 공장 건설은 트럼프 행정부의 반도체 공급 사슬망 안정화 정책 때문으로 애플, 엔비디아 등 미국 업체들과의 협업이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반면 화웨이 등 중국 업체와의 협업은 줄 수밖에 없어 SMIC의 중국 내 수주 물량은 한층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일각에서는 삼성전자파운드리 사업부 또한 중국 팹리스 물량 확대가 기대된다는 전망을 내놓지만 미국이 삼성 측에도 TSMC와 비슷한 압박을 가할 수 있다는 점에서 반사이익은 크지 않을 전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