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탁기나 청소기와 같은 가전제품은 주부들에게 편리함, 편안함, 효율성을 줬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가전제품이 오히려 더 많은 일을 만들어냈다면? 빨래는 세탁기가, 청소는 청소기가, 음식은 가스레인지가 한다는 생각에 당연한 듯 더 많은 빨랫감을 내놓고, 다양한 음식을 요구하며, 위생과 청결에 대한 기대치도 올라가면서 가사노동 시간은 오히려 더 늘어났다.
신간 ‘세탁기의 배신’은 ‘왜 가전제품은 여성을 가상노동에서 해방시키지 못했는가’라는 부제에서 알 수 있듯이 가전제품이 여성을 해방해주기는커녕 결과적으로 주부들에게 또 다른 일거리를 만들어줬다고 강조한다. 가사노동의 강도는 줄었지만 집안일은 해도 해도 끝이 없는 지겨운 일과로 남아 주부들을 자유롭지 못하게 한 것이다. 가사노동은 몸과 마음을 투입해야 하는 노동이지만 금전적 보상이 없기에 투명인간처럼 보이지 않는 ‘그림자노동’이라 불리기도 한다.
저자인 김덕호 한국기술교육대학교 교양학부 교수는 “가사노동에 전념하지도 않는 주제에 가사노동과 가사기술의 역사에 관한 책을 쓰게 됐다”며 여성과 가사노동, 가사기술에 대한 연구를 망라하고 서구 페미니즘의 역사가 가사기술에 끼친 영향을 개괄했다. 특히 미국을 중심으로 노동절약적·시간절약적 가전제품들이 20세기 전반에 도입됐음에도 왜 여성들의 가사노동시간이 여전하거나 오히려 더 늘어났는지 세탁기, 청소기, 냉장고를 중심으로 분석했다. 1920년대 미국 광고 사진들을 통해 당시 가전제품 광고 메시지가 주부의 욕망을 어떻게 건드렸는지 보여준 것도 흥미롭다. 광고는 완벽할 수 없는 주부들의 집안일을 자기 회사의 가전제품이 기꺼이 도와주어 완벽하게 만들어줄 수 있다고 속삭이며, 아내는 집을 ‘천국 같은 안식처’로 만들어놓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지금 같은 소비자본주의 체제하에서는 아무리 많은 가전제품들이 출현해도 가사노동이 구조적으로 ‘그림자노동’의 굴레 벗어날 수 없고 이는 대부분 주부만의 몫이라면, 역사학자 루스 코완이 제기한 ‘기이한 패러독스’는 근본적으로 해결되기 힘들다고 저자는 말한다. ‘코완의 패러독스’는 가전제품이 가사노동 강도를 줄여주었지만 가사 노동 시간은 할머니 세대, 어머니 세대와 비슷하거나 오히려 많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해결책은 없는 것일까. 저자는 “가사노동이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최소한이라도 공평하게 분배되고, 자녀들이 자발적으로 가사노동에서 할 수 있는 자신의 일을 찾아서 부모를 돕는다면 ‘코완의 패러독스’는 해결될 여지가 있다”고 말한다. 1만8,000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