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일 만에 공개활동을 재개한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핵전쟁 억제력 강화”를 주문한 가운데 그의 의도가 미국·한국 정부가 바라는 비핵화 조치와는 완전히 반대인 것으로 분석돼 우려를 낳고 있다.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원하는 미국 정부의 입장과 달리 김정은은 ‘전략 무력의 고도화’라는 사실상의 핵 카드를 꺼내 ‘내 갈 길을 기겠다’는 구상을 공개적으로 내비쳤다. 일각에서는 미국이 28년만에 핵실험 재개를 검토했다는 소식 속에 북한 역시 핵탄두 탑재가 가능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나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을 조만간 개발·실험하는 게 아니냐는 걱정도 나온다.
“전략 무력, 고도의 격동상태에서 운영”... ICBM·SLBM 추진 우려
조선중앙통신 등 북한 관영매체들은 24일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제7기 제4차 확대회의 개최 소식을 전하면서 “김정은 동지께서 회의를 지도하시었다”고 밝혔다. 지난 2일 평안남도 순천인비료공장 준공식에 참석한 모습이 공개된지 22일(보도 날짜 기준) 만이다.
통신은 이날 회의에서 “국가 무력 건설과 발전의 총적 요구에 따라 나라의 핵전쟁 억제력을 한층 강화하고 전략 무력을 고도의 격동상태에서 운영하기 위한 새로운 방침들이 제시됐다”고 전했으나 구체적인 내용은 언급하지 않았다. 또 “조선인민군 포병의 화력타격능력을 결정적으로 높이는 중대한 조치들도 취해졌다”고 소개했다.
북한 전문가들은 김정은이 이번 회의를 통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느슨해진 군부를 다잡고 내부 결속을 꾀하는 것으로 평가했다. 이와 함께 일각에서는 ‘전략 무력을 고도의 격동상태에서 운영하기 위한 새로운 방침’ ‘조선인민군 포병의 화력타격능력을 결정적으로 높이는 중대한 조치’ 등에 ICBM이나 SLBM도 포함되는 것으로 분석했다. 신형 잠수함 진수식과 SLBM 시험발사 등이 임박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조선중앙통신은 “공화국 무력의 군사정치 활동에서 나타나는 일련의 편향들에 대하여 총화 분석하고 그를 극복하고 결정적 개선을 가져오기 위한 방조적 문제들과 무력구성에서의 불합리한 기구 편제적 결함들을 검토하고 바로 잡기 위한 문제 자위적 국방력을 급속적으로 발전시키고 새로운 부대들을 조직 편성해 위협적인 외부세력들에 대한 군사적 억제 능력을 더욱 완비하기 위한 핵심적인 문제들이 토의됐다”고 전했다. 이번 회의는 실내 행사였음에도 김정은뿐 아니라 모든 참석자들을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핵무기 개발 책임자 중용... 核카드로 美압박
일부 전문가들은 지난달부터 ‘신병 이상설’을 무릅쓰고 이어진 잠행도 전략 무기의 고도화 작업과 무관하지 않은 게 아니냐는 분석이 나왔다. 실제로 미국 북한 전문 사이트 ‘분단을 넘어(BEYOND PARALLEL)’는 이달 5일(현지시간) ‘신리 탄도미사일 지원시설’이라는 보고서를 웹사이트에 게시하고 북한이 평양 순안국제공항 인근 ‘신리’라는 곳에 탄도미사일 프로그램 확장과 관련한 것이 거의 분명한 대규모 시설 완공을 앞두고 있다고 전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의 새 시설 가운데 천장 고도가 높은 건물은 ICBM인 ‘화성-15’와 북한의 모든 탄도미사일을 수용할 만큼 충분히 크다. 존 랫클리프 미국 국가정보국(DNI) 국장은 같은 날 미국 상원에서 열린 인준 청문회에서 “북한 정권의 계속되는 핵무기 보유와 이를 발사할 수 있는 시스템 추구는 여전히 깊은 우려를 낳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번 회의에서는 당 중앙군사위원회와 군 고위층에 대한 인사도 단행했는데 무엇보다 북한 미사일 개발 분야의 핵심 인사인 리병철 노동당 부위원장 겸 군수공업부장이 중앙군사위 부위원장으로 선출된 점이 눈에 띄었다. 리병철은 북한 핵과 미사일 개발을 책임진 핵심 인사로 꼽힌다. 김정은 집권 후 수년간 주요 무기 실험 현장에서 김정은을 지근 거리에서 보좌했다. 이번 회의에서는 리병철 외에도 포병 전문가인 박정천 군 총장모장이 차수로, 정경택 국가보위상이 대장으로 각각 승진했다.
‘핵전쟁 억제력’이라는 표현은 다분히 미국을 겨냥한 표현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지난해 2월 하노이 협상 결렬 이후 북미관계가 교착 상태를 이어가면서 코로나19 사태로 어려움에 빠진 북한이 미국에 다시 한 번 압박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는 해석이다. 양무진 북한대학원대 교수는 “미중 간 신냉전이 가속화되는 가운데 마이크 폼페이오 미국 국무장관이 연말까지 북미협상이 없다고 한 상황에서 군사분야에서의 논의 과정이 필요했을 것”이라며 “구체적으로 핵 억제력 강화라는 표현이 2년 만에 등장했다는 점에서 우려스럽다”고 밝혔다.
韓 ‘비핵화 구상’과 반대... 美는 28년만 핵실험 검토
김정은의 이 같은 행보는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비핵화를 강조한 미국 정부와는 전혀 상반된 것이다. 북미 관계 복원을 꾀하는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프로세스 구상과도 차이가 큰 것으로 진단된다. 김정은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북핵 관련 업적을 겨냥해 미국 대선판에 영향을 주려 한다는 분석도 나온다.
폼페이오 장관은 지난 7일(현지시간) “미국은 북한의 비핵화를 설득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하길 원한다”고 말하면서도 ‘검증가능한 비핵화’ 원칙을 사실상 재확인했다. 또 다른 미국 국무부 관계자도 20일(현지 시간) 미국의소리(VOA) 방송에 보낸 논평에서 “남북협력이 반드시 (북한) 비핵화의 진전과 보조를 맞춰 진행돼야 한다”꼬 재강조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최근 북한 비핵화에 대한 언급을 자주 하지는 않았지만 지난해 말 기고 전문매체 ‘프로젝트 신디케이트’를 통해 “북한이 진정성을 갖고 비핵화를 실천해 나간다면 국제사회도 이에 상응하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고 밝힌 바 있다. 문 대통령의 한반도 평화 구상에 북한 비핵화 실천이 여전히 가장 절대적인 전제라는 점을 확인한 셈이다.
청와대 관계자는 이날 “관련 부서에서 분석 중”이라며 “더 이상 말할 수 있는 내용이 없다”고만 했다.
한편 미국 워싱턴포스트(WP)는 22일(현지시간) 미국 행정부 고위관료를 인용해 이달 15일 국가 안보기관 수장들이 모인 회의에서 미국이 지난 28년 동안 중단됐던 핵실험 재개를 검토했다고 보도했다. 최근 핵실험 의혹을 받는 러시아와 중국에 경고장을 날린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