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여름, 찌는듯한 무더위에 툴툴대며 뮤지컬 ‘번지점프를 하다’ 프레스콜에 갔던 날을 기억한다. 뮤지컬 붐에 편성해 작품성과 상관없이 쏟아지던 드라마컬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뿌리째 뽑아 던져버리게 만들었던 그날, 그녀의 노래는 마치 소리가 온 몸을 감싸안는 것처럼 감미로웠다.
무대 위에서 그녀는 늘 첫사랑과 같았다. 뚜렷한 이목구비와 폭발적인 성량을 앞세운 주연 배우들 사이에서 전미도의 청초함과 부드러운 목소리는 독보적이었다. ‘해를 품은 달’의 연우였고, ‘베르테르’의 롯데, ‘닥터 지바고’의 라라였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자신만의 역할이 있었다.
무대가 브라운관으로 바뀌었다 해도 달라질건 없었다. tvN ‘슬기로운 의사생활’ 첫방송이 끝나자마자 인터넷상에서는 ‘전미도가 누구냐’라는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도대체 이런 배우가 어디서 튀어나왔냐는 목소리들 사이에서 뮤지컬을 좋아하는 팬들은 기쁘면서도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이제 공연 티켓은 어떻게 구하지…’
“팬들로부터 좋은 드라마를 해줘서 고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어요. 팬들이 거의 직장인이다 보니 일을 하며 겪는 고초 등 공감되는 부분이 많았나봐요. 위로가 되는데 내가 좋아하는 배우가 나와 더 감동스럽다고 하셨어요. 물론 다음 공연 티켓팅에 대한 하소연도 있었죠. 나이 들어 클릭하기 힘든데 이제 어떻게 티켓을 구하냐고. 파이팅 하라고 할 수밖에….”
“주변 분들이 음원 1위, 시청률, 댓글을 사진 찍어서 보내주세요. 그걸 보고 ‘이렇게 좋아해주시는 분들이 있구나’ 하며 많이 놀라요. 저나 남편이나 그걸 보며 감사하면서도 정말 신기해하고 있어요.”
신원호PD와 이우정 작가의 트레이드마크인 남편찾기 코드는 이번에도 주효했다. 20년간 고백하지 못한 마음을 품은 친구냐, 따뜻한 연하남이냐 기로에서 결국 제작진은 대답을 다음 시즌으로 넘겼다. 일부 유튜버는 매 장면을 세심하게 분석해 이익준(조정석)과 결실을 맺게 될 것이라고 예상해 큰 관심을 얻기도 하고, 시청자들은 치홍이냐 익준이냐 파가 갈렸다. 그러나 정작 대본이나 촬영 현장에서는 러브라인 관련 이야기는 많지 않았다. 또 작품이 ‘시즌제’로 진행되는 만큼 최고의 흥행코드를 한 시즌에 끝낼 리도 만무했다.
“끝까지 송화 마음은 몰라요 결말이 안 났으니까. 대본상에서도 얻을 수 있는 정보는 처음 밴드 연습할 때 ‘캐논을 치는 익준이를 송화가 미소지으며 바라본다’ 정도가 전부에요. 시즌1에서는 정확한 정보가 없어서 섣불리 말씀드리기는 어려워요.”
“촬영하면서는 당장의 대본과 장면에 충실해야 하다보니 표현에 바빠 시청자 입장을 생각하지 못했어요. 막상 방송 보니 ‘송화는 어떤 마음인지 모르겠다, 답답할 수 있겠다’ 해요. 시즌제이기도 하고 짧은 회차에 모든 것을 설명할 수는 없었을 거에요. 다만 만약에 송화가 익준이를 좋아했었다면, 익준이가 결혼할 때 어떤 마음이었을지는 정말 궁금해요.”
드라마와 영화에 잠시 출연한 적은 있으나 홍일점 주연은 처음이다. 첫 주역작임에도 전혀 이질감이 없었던 것은 배우로서의 욕심 때문이었다. 공연하며 ‘감사함도 잃어가는 것 같고, 처음 시작할 때의 순수함이 사라지고, 정형화되고 있다’는 생각에 낮선 곳에서 부딪혀보기로 마음먹었다. 본인을 잘 모르는 사람들 속에서 얼마나 감사한지를 깨닫고 싶었다.
오디션과 때맞춰 조정석과 유연석은 신PD에게 전미도를 추천했다. ‘슬기로운 깜빵생활’에서 박해수를 깜짝 발탁해 성공했으나 이번에도 잘되리라는 법은 없었다. 전미도의 캐스팅을 두고 모험이라 생각해 쉽게 결정하지 못했을 때 조정석과 유연석의 한마디는 큰 힘이 됐다. 이들 모두 무대에만 서면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는 그의 매력을 십분 이해하고 있었다. 3차에 걸친 오디션 끝에 신PD는 전미도에게 이렇게 말했단다. “연기로 모든 후보들을 이기셨습니다.”
단순한 로맨스 드라마가 아니다보니 여주인공이지만 늘 가운에 안경차림이었다. 병원을 나온다 해도 대부분 정장을 입었다. 직업적으로 프로페셔널한 모습이 첫 번째, 인간적인 모습이 두 번째였다. 신PD도 ‘실제 사람 사는 이야기’라고 다른 메디컬 드라마와는 선을 그었다. 그래도 실제 의사들에게 철저한 자문을 받았고, 수술 장면에서는 항상 전문의가 참관하며 현실감을 입혔다.
“대본 구성상 채송화는 의사로 비쳐야 하니 프로페셔널한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어요. 그리고 한 친구마다 직업은 의사지만 인간적으로는 직업적 이미지의 반대되는 모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교회에서 춤추는 장면이라든지, 보컬을 하고 싶어 친구들에게 사기를 친다든지…. 특유의 뉘앙스나 용어를 말할 때의 자연스러움 등 외형적 부분도 무시할 수 없었고, 병원에 가보니 안경을 쓰지 않은 선생님이 안 계시더라고요. 그런 부분들도 신경써서 캐릭터를 만들었죠.”
“우리가 실제 만나는 의사 분들은 드라마와 다른가봐요. 찾기 어려운 의사들을 드라마에 다 모아놓은 것 아닐까요. 코로나19 때문에 대구를 향해 가는 의료진을 보면서 사실 저분들이 우리 드라마에 나오는 의사들과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어요. 제가 만난 의사들은 육체적으로도 힘들지만 모두 아픈 사연을 가져와 쏟아내기에 감정노동도 있었거든요. 왜 우리 머리에 불친절한 이미지로 박혀있는지 깨닫게 됐죠. 그래도 표현하지 않아서 그렇지 대구를 향하는 그 마음이 다들 있을거에요.”
한 회차의 에피소드가 마무리될 즈음이면 어김없이 다섯 친구들의 합주가 시작된다. 극중 등장한 ‘아로하’는 조정석, ‘사랑하게 될 줄 알았어’는 전미도가 불러 음원차트 1위를 차지하기도 했다. “온 우주가 지금 나를 도와주는 것 같다”는 그는 초반만 해도 많이 떨었던 친구들이 어느새 적응해 쉬는 기간에도 만나 합주를 이어가고 있다. 시즌2를 위한 대비다.
“조정석 배우 빼고는 처음에 다 어설펐어요. 그마저도 클래식 기타를 하던 사람이라 그나마 빨리 적응한거고. 촬영 전에는 개인연습을 하고 합주하는 시간을 꼭 가졌어요. 현장에서 불필요한 시간들이 생기지 않도록 합을 맞추고 촬영해서 특별히 힘든적은 없었는데 처음에는 연주 장면을 클로즈업해 들어올 때 손들이 다 떨리더라고요. 진땀 뺐어요.”
“혹시나 시즌2까지 악기를 놓게 되면 그동안 했던 것들이 사라질까봐 쉬는 동안에도 일정기간 만나 합주하기로 했어요. 촬영을 모두 마치고도 2번 만나 연습을 했고요. 팬들이 콘서트 이야기도 하시는데 지금은 코로나19 때문에 모이기 힘들지만, 많은 사랑에 어떻게든 보답하려는 생각들은 하고 있어요.”
드라마가 끝나면서 전미도는 다시 제자리로 돌아간다. 6월 30일 개막하는 뮤지컬 ‘어쩌면 해피엔딩’에는 도재학 선생으로 출연한 정문성도 함께 출연한다. ‘슬의생’으로 확실히 얼굴을 알렸으니 다시 드라마나 영화를 통해 입지를 굳힐 만도 하지만, 작품이 시즌제인 이상 아직은 채송화로 시청자에게 각인되는게 좋겠다는 판단이다.
“드라마가 한번 하고 끝나면 계획이 달라지겠지만, 시즌이 또 있으니까 아직 채송화를 더 보여주는게 좋다고 생각했어요. 쉬고 싶기도 한데 ‘어쩌면 해피엔딩’의 개발단계부터 함께 했고, 상도 받았고, 도움도 되고 싶었어요.”
최근에는 백상예술대상 신인상 후보에도 올랐다. ‘신인상 후보에 올랐으니 신인이 맞다’고 아주 좋아한 그는 이미 뮤지컬계에서는 온갖 여우주연상을 꿰찬 톱 배우다. 카메라 연기 경험도 부족하고, 신인의 자세를 갖기 위해 도전했으니 만족한다는 그는 신인상 후보에 끼어있다는 것만으로도 신기하고 기분이 너무 좋단다.
“안주하는게 싫어요. 고여있는 것도 싫고. 연기도 고여 있지만, 나라는 사람 자체도 머물러 있을 수 있거든요. 거기에 빠지면 나르시즘을 느끼지 않을까. 그때 연기가 재미 없을까봐, 그게 가장 무서워서 새로운 장르와 작품에 도전하려 계속 노력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