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52년 6월 4일, 아틸라가 이끄는 훈족 군대가 서로마제국(이탈리아) 북부를 침공해 들어왔다. 로마는 공포에 빠졌다. 거친 유목민족인 훈족 중에서도 아틸라는 ‘포악하고 잔인한 성정’으로 악명 높았기 때문이다. 1년 전 갈리아(오늘날 프랑스 지역) 침공에서는 신속한 기동과 잔혹함으로 ‘신이 보낸 형벌’로 불렸다. 로마도 겁에 질렸지만 아틸라 역시 로마 침공은 막다른 기로였다. 갈리아 전쟁에서 패배에 가까운 무승부를 기록한 이후 유럽 국가들이 보내는 공물이 줄고 몇몇 부족들은 동맹에서 이탈하려는 조짐을 보였다.
아틸라의 로마 공격 명분은 혼인지참금. 서로마제국 호노리나 공주가 아틸라에게 반지를 보내며 청혼했다는 사실을 들어 결혼지참금으로 땅을 요구했다. 호노리나 공주는 시종의 아이를 임신한 뒤 발각되자 황제를 암살하려다 실패했던 황제의 친누나. 동로마의 궁에 유폐 당하는 신세로 전락하자 ‘세상에서 가장 강한 군주’에게 청혼 편지를 보냈고 아틸라는 받아들였다. 땅을 내놓으라는 요구가 통하지 않자 직접 빼앗겠다던 아틸라는 파죽지세로 북부 이탈리아를 휩쓸었다. 파두아, 비첸자, 베로나, 밀라노, 파비아 등이 함락되고 베르가모 등은 싸우지도 않고 성문을 열었다.
황제 발렌티아누스 3세마저 수도를 버리고 도망친 상황에서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다. 전선으로 찾아온 교황 레오 1세의 설득에 아틸라는 군사를 돌렸다. 교회는 신의 징벌에 관련한 레오 1세의 배짱과 설교가 통했다고 자랑해왔으나 실제 이유는 따로 있다. 서쪽에서는 고트족이, 동쪽에서는 동로마제국의 군대가 접근해 훈족이 협공당할 가능성이 컸다. 갈리아 전쟁의 재연을 우려한 아틸라는 전염병이 도지는 군대에 후퇴 명령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훈족의 아틸라는 로마제국 점령은 실패했어도 세계사에 세 가지 흔적을 남겼다.
첫째는 교황 권력의 태동. 교황 레오 1세는 455년 반달족의 로마 약탈에서도 침략자들과 담판을 벌여 피해를 최소화해 시민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종교에 머물던 교황의 권위는 점차 정치 무대로 넓어졌다. 둘째는 베니스 공화국의 탄생. 난공불락의 요새라던 아퀼레이아 함락 이후 훈족의 경기병들이 추적하지 못할 바닷가로 피한 게 중세 무역을 주름잡던 베니스의 탄생 배경이다. 세 번째, 근거 없는 증오가 심어지고 훈족은 악의 대명사로 굳어졌다. 미국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며 ‘훈족(독일)과 싸우자’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코로나 이후 동양에 대한 해묵은 편견과 차별이 되살아나고 있다. 인류 공존의 지혜가 절실한 때다.
/권홍우선임기자 hongw@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