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16일 오전 남북 합의에 따라 비무장화된 지역의 ‘요새화’를 선언한 데 이어 이날 오후 남북연락사무소를 폭파한 것은 우리와 미국을 향한 전형적인 ‘벼랑 끝 전술’로 보인다. 장기간의 고강도 대북제재로 통치자금인 외화 확보에 어려움을 겪고 있는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재선을 앞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문재인 대통령을 동시에 압박하는 모양새다. 청와대는 이날 정의용 국가안보실장 주재로 긴급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회를 열고 이 문제를 심도 깊게 논의한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트럼프 대통령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방역 실패와 흑인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으로 최대 위기에 몰려 있다. 이런 상황에서 ‘북한 리스크’까지 발생할 경우 트럼프 대통령의 재선 전망은 더욱 어두워질 수밖에 없다. 문 대통령 역시 임기 후반 정권의 최대 역점 사업인 한반도 평화 프로세스에서 성과를 내야 할 중요한 시기다.
김 위원장은 이같은 남한과 미국의 정치상황을 보며 적합한 도발 시기를 택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북한이 북미 비핵화 협상과 관련해 ‘정면돌파전’을 내세우며 ‘신형 전략무기’ ‘핵전쟁 억제력 강화’ 등의 엄포를 놓았음에도 한미가 대북제재를 완화할 움직임을 보이지 않자 연락사무소 폐쇄라는 실력행사를 한 것으로 관측된다.
남성욱 고려대 통일외교학부 교수는 “연락사무소 폭파는 남한에 큰 피해를 준 것은 아니지만 남북관계가 대적 관계임을 명확히 보여주는 것인 만큼 관념적인 충격이 클 것으로 보인다”며 “북한은 도발 수위를 서서히 단계적으로 끌어올릴 것”이라고 진단했다.
이에 따라 북한은 비무장화 지대 요새화,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등 트럼프 대통령이 정한 레드라인(금지선)에 준하는 무력도발을 단계적으로 상향할 것으로 예상된다.
특히 한미 연합군사훈련이 예정된 오는 8월과 노동당 창건 75주년인 10월에 도발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다. 최근 북한의 행보를 볼 때 김 위원장의 도발 시기는 더 앞당겨질 수 있다는 전망도 적지 않다.
북한이 빠르고 강한 칼을 빼든 것은 무엇보다 미국을 중심으로 한 고강도 대북제재로 통치기반이 흔들리는 것을 막기 위한 대응으로 분석된다. 집권 후 북한 주민들에게 경제발전을 약속한 김 위원장은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는 주민들의 분노를 돌릴 외부의 적이 필요했다는 관측이다. 자신의 통치자금인 외화보유량이 바닥나고 있는 점도 김 위원장의 초조감을 키웠을 것으로 보인다.
요미우리신문은 이날 서울발 기사에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와 미국 등의 경제제재를 받는 북한이 이르면 2023년 보유 외화가 바닥나는 상황을 맞을 가능성이 있는 것으로 한미일 협상 소식통이 분석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신문은 북한이 2017년 세 차례에 걸친 유엔 안보리 결의로 석탄·철광석·섬유·해산물 등의 수출을 못하게 돼 전체 수출 수입의 90%를 잃었다고 평가했다. 주요 외화 획득 창구였던 북한 근로자들의 해외취업은 지난해 말을 시한으로 더는 할 수 없게 됐다고 신문은 덧붙였다.
일각에서는 이번 연락사무소 폭파가 김 위원장의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을 후계자로 지명하기 위한 일련의 과정이라는 해석도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실제 김 위원장은 올해 코로나19 상황이 절정에 달하던 4월 신변이상설에 휩싸인 바 있다. 의료계에서는 김 위원장이 흡연과 고도비만으로 심혈관계 질환을 앓고 있을 가능성이 높고 언제든 사망할 수 있다는 평가가 많다. 최근 김 제1부부장은 대남사업을 총괄하는 데 이어 군부에도 영향력을 미치고 있다. 북한의 실력행사도 김 제1부부장이 13일 “우리는 곧 다음 단계의 행동을 취할 것”이라며 “다음번 대적 행동의 행사권은 우리 군대 총참모부에 넘겨주려고 한다”고 밝힌 후 불과 사흘 만에 나온 조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