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공동연락사무소가 폭파됐다. 북한 김여정 제1부부장이 호언한 바와 같이 형체도 없이 무너지는 비참한 광경을 목격했다. 그 결과 뭐 하나 제대로 지켜지지 못했던 ‘4.27 판문점 정상회담 공동선언’의 마지막 유산도 사라져 버렸다. 북한의 실질적 비핵화가 뒷받침되지 못한 남북관계 개선은 ‘사상누각’(沙上樓閣)에 불과하다는 교훈을 다시 한번 일깨워 준다.
북한의 대남 강경 행보는 이미 예견된 것이었다. 남북관계를 북미관계의 하위 요소로 인식해 온 김정은 정권이 연초에 대미 정면돌파전을 선언할 때, 남북관계에서도 얻을 것이 없다는 계산도 마쳤을 것이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 19)으로 인해 북한의 경제 상황이 더욱 어려워지자 그 책임을 외부로 돌릴 필요성도 느꼈을 것이다. 본격적인 대남 강경책을 전개할 시기를 엿봤을 것이고 탈북단체의 대북전단 살포를 계기로 준비해 놓은 카드들을 하나씩 꺼내 들고 있다.
우리 정부의 설익은 대북 유화책은 통할 수가 없었다. 북한의 의도를 전혀 읽지 못한 채 대북전단만 막으면 북한과 대화를 복원할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집착했다. 그러다 보니 대북전단 살포를 금지하는 법을 만들려 하고, 아무런 사전 예고도 없이 탈북 활동가와 관련 단체를 수사 의뢰하기도 했다. 하지만 북한의 행보는 더욱 대담해졌고, 더욱 모욕적이었으며, 더욱 공세적으로 변했다. 뒤늦게 정부는 북한의 책임을 언급하고 강력히 대응할 것을 엄중히 경고했지만 이미 빛이 바래버렸다.
한반도 정세는 앞으로 더욱 악화될 전망이다. 대남관계를 총괄한다는 김여정의 입에서 뱉어진 개성공단 철거와 9.19 군사분야부속합의서 파기도 곧 가시화될 것으로 보인다. 나아가 한미 연합군사훈련이 예정된 8월과 북한 노동당 창건기념일 75주년을 맞는 10월에는 미국을 향한 전략도발도 예상된다. 그들 스스로 밝힌 ‘새로운 전략무기’를 선보인다면 재진입 기술이 완성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이나 신형 잠수함에서 직접 발사되는 탄도미사일(SLBM)을 시험 발사할 가능성이 높다. 이 경우 도널드 트럼프 행정부의 대응 강도에 따라 한반도가 격동의 소용돌이에 빠질 우려가 크다.
지난 2년여 동안 문재인 정부는 마치 한반도에 전례 없는 평화가 찾아온 양 홍보했지만 그 현주소는 참담하기 그지없다. 이제라도 올바른 대북정책을 전개하기 위해서는 문제의 원인을 먼저 알아야 한다. 그것은 지난 2년여의 남북관계가 실질적 신뢰구축에 기반하지 않고 정상회담과 같은 이벤트 중심의 형식적 관계 개선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북한이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대남 신뢰구축 조치는 비핵화다. 우리 정부는 김 위원장의 비핵화 의지를 확인했다고 했지만, 그동안 북한의 실질적 행동으로 보인 것은 이미 쓸모가 없어진 풍계리 핵실험장 폭파뿐이었다. 북한 비핵화 없는 남북관계의 실질적 진전은 없다는 역사적 교훈이 다시 한번 확인된 셈이다.
위기가 찾아온다고 해서 허둥댈 필요도 없다. 북한의 공동연락사무소 폭파는 긴 남북관계 속에서 발생한 하나의 사건에 불과하다. 그보다는 현재 대남 강경책을 추진하고자 하는 북한이 보여줄 일련의 행동들을 이해해야 한다. 그리고 남북관계에서만 답을 찾을 것이 아니라, 한반도를 둘러싼 보다 큰 구조적 틀에서 해법을 찾아야 한다.
북한은 그들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미국과 중국 사이를 오갔다. 그렇다면 우리 역시 한미동맹과 한중관계, 그리고 미중관계와 같은 보다 거시적 접근에서 답을 찾아야 한다. 한미동맹을 강화하며 북한의 추가적인 도발을 막고 한중관계나 미중관계를 활용해 북한을 다시 협상장으로 끌어내야 한다. 남북관계에 매달리며 북한의 무리한 요구를 들어줄 것이 아니라, 주변국과 공조하며 한반도의 안정을 회복할 필요가 있다. 국제공조를 통해 북한 비핵화에 기반한 실질적 관계 개선을 이루는 것이 또 다른 모래 위의 집을 예방하는 유일한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