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외교관 출신인 태영호 미래통합당 의원은 “6·25전쟁이 북한의 남침이란 사실을 똑바로 아는 것이 앞으로 대한민국 통일을 건설하는 데 중요한 문제”라고 24일 지적했다. 이날 국회에서 태 의원은 청년 33명과 함께 ‘6·25 바로 알기’ 토론회를 개최해 6·25전쟁을 남한의 북침으로 포장하는 것이 어떻게 북한의 체제를 강화하는지 분석했다.
태 의원은 “북한에선 ‘미제 승냥이(미국)’의 사주를 받은 이승만 대통령이 6·25전쟁을 일으켰다고 주장하면서 본격적인 반미교육이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한 달 안에 끝날 줄 알았던 전쟁이 3년간 이어져 최소 400만여 명이 사망하고 국부에 큰 손실을 일으키자 북한 지도부가 전쟁에 대한 책임 회피를 꾀한 것이다. 태 의원은 “1950년대엔 북한을 폭격한 미국에 대한 증오심이 최대로 높았다”면서 당시 탁아소에서조차 ‘미국놈 때리기’ 놀이를 지시했다고 회상했다.
이날 태 의원은 자신이 처음으로 본 미국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에 나온 노래 ‘에델바이스’와 ‘도레미송’을 열창했다. 이어 12살 때 평양 외국어학원에서 영화를 보고 처음으로 미국 사람이 ‘승냥이’가 아닌 ‘인간’일 것이란 생각의 전환을 맞게 됐다고 설명했다.
나아가 “북한 엘리트층은 6·25전쟁의 미군 폭격 피해자들의 직계자”임 점을 강조했다. 북한에서 엘리트 교육을 받은 태 의원은 “이들이 6·25전쟁을 일으킨 사람이 김일성이란 사실을 받아들이면 북한에선 엄청난 변화가 생길 것”이라고 예고했다. 이런 이유로 대한민국에 정착한 새터민이 가장 충격받는 대목도 ‘북한의 남침’이다.
북한 사회의 최대 트라우마가 6·25전쟁인 만큼 북한 지도부는 어떻게든 6·25전쟁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고 싶어한다. 최근 러시아에서 북한군 제783부대와 제2사단의 전투명령서를 공개하며 ‘북한 남침’의 결정적인 증거를 드러내자 북한 학계에선 “남한이 남침을 유발했다”는 논리가 주를 이룬다고 설명했다.
태 의원에 따르면 1949년 3월 북한의 지도자였던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에게 남침을 제안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라는 답변을 받는다. 그러나 5개월 후 소련이 핵무기 개발에 성공하고 중국의 공산주의 세력이 내륙을 점령하면서 ‘전쟁을 일으켜도 좋은 시기’가 찾아온다. 단, 스탈린은 북한에 탱크 수백 대를 지원하며 “이른 시일 내 전쟁을 끝낼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인민군의 서울 수복 작전이 춘천에서부터 막히면서 한국군을 궤멸하려는 북한의 속전속결 전략이 실패했다.
앞서 한반도가 갈라진 1945년, 북한의 당 강령은 조선혁명의 성격을 ‘반봉건·반미제’로 설정해 “미국의 식민지인 남조선을 해방하기 위한 투쟁”을 정당화한다. 이는 남침을 옹호하는 분위기를 자아냈다. 태 의원은 6·25전쟁에 직접 참가했던 친척이 “사실 전쟁이 한 달 안에 끝난다길래 지시가 올 때까지 남한에서 대기했다”며 북한의 남침을 인정했다고 설명했다.
북한의 체제를 공고히 하는 ‘6·25 북침’ 주장은 남북관계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태 의원은 “6월 25일 ‘로동신문’의 기조를 보면 그 해 하반기 대남·대미 정책을 알 수 있다”고 설명했다. 판문점 선언으로 남북관계가 개선됐던 지난 2018년 6월 25일 로동신문은 이례적으로 6·25전쟁을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2019년 6월 25일 다시 ‘미제’·‘남침’ 등의 단어가 신문 1면에 등장했다. 오늘 자 북한의 로동신문이 6·25전쟁을 다룬 태도가 하반기 남북관계를 암시하는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