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사외칼럼

[로터리]캘리포니아 와인은 어떻게 유명해졌는가

나재철 금융투자협회장

나재철 금융투자협회장나재철 금융투자협회장



캘리포니아 와인이 처음부터 유명했던 것은 아니다. 지난 1976년 프랑스와 미국 와인의 블라인드 테스트를 할 때까지만 해도 ‘세계최고의 와인은 프랑스산’이란 믿음은 굳건해 보였다.

테스트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전문가들이 꼽은 최고의 와인 리스트 상위권을 미국산이 휩쓸었다. 프랑스는 충격에 빠졌고, 미국은 새로운 기회를 맞았다.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서 ‘파리의 심판’이라 불리는 사건이다.

포장된 이미지는 우리 눈을 현혹하지만 진짜 실력은 보이는 것과 다른 경우가 많다. 와인 같은 정성적 영역에서도 그럴진대 숫자로 드러나는 정량적 영역에서는 두말할 나위가 없다.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면서 퇴직연금에 대한 불만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현 제도의 가장 큰 문제는 저수익 고착화이다. 근로자가 책임지고 운영해야 하는 확정기여(DC)형 퇴직연금의 경우에도 자산 대부분을 원리금보장상품에 묶어둔다. 2007년 2조7,000억원의 퇴직연금규모가 지난해 말 220조원까지 늘었음에도 원리금보장상품 비중이 도리어 늘어난 원인이다.

관련기사



대안으로 디폴트옵션이 논의된다. 평소 자산관리가 곤란한 이들이 전문가의 도움을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노사합의를 통해 근로자가 동의하면 전문가가 잘 설계한 금융상품으로 자산을 운용하는 제도다. 물론 해당 옵션을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 금주하는 자에게 억지로 술을 권하는 게 아니라 와인 입문자에게 다양한 선택지를 주고 냉정한 평가를 받자는 것이다.

디폴트옵션이 도입되면 금융회사의 민낯이 여과 없이 드러나게 된다. 현행 제도에서 개별 금융회사의 퇴직연금 수익률 비교는 큰 의미가 없다. 가입자의 91.4%가 당초 선택한 금융상품을 변경하지 않고 계속 운용하는 상황에서 수익률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지만 디폴트옵션이 정착되면 얘기가 달라진다. 각 퇴직연금사업자가 수익률을 책임져야 하고 그 결과가 몇 년에 걸친 누적수익률로 나온다. 개별 금융회사의 성적표가 대자보로 붙는 꼴이다.

숫자로 드러나는 경쟁 앞에서 포장된 이미지는 허울에 불과하다. 게임의 규칙이‘계약 유치 경쟁’에서‘운용 성과 경쟁’으로 바뀌는데, 계약 유치를 위한 실속 없는 영업에 과도한 비용을 지불할 금융회사는 없다.

‘파리의 심판’ 같은 평가가 매일 이루어지면, 그 경쟁의 과실(果實)은 고스란히 퇴직연금 가입자의 몫이다. 의외의 금융회사가 가장 뛰어난 성과를 낼 수도 있다. 40여 년 전 캘리포니아 와인이 그랬듯 뚜껑은 열어봐야 안다. 디폴트옵션 도입 과정에서 또 다른 캘리포니아 와인이 탄생할 수 있기를 기원한다.

<저작권자 ⓒ 서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더보기
더보기





top버튼
팝업창 닫기
글자크기 설정
팝업창 닫기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