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등학교에서도 철학을 배울 수 있지만 잘 선택하지 않는다. 어렵게 보이고 대입 시험 문제에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활동이 ‘기승전대입’이므로 삶의 지혜를 배우려면 철학을 배우는 것이 좋다는 이야기는 큰 반향을 얻지 못한다. 대학에서도 철학을 포함한 인문학은 교양에서 필수 과목으로 지정되면 어쩔 수 없이 듣지만 선택 과목이라면 수강하려는 사람이 많지 않다. 고교 때와 마찬가지로 어렵게 보이고 취업에 직접 도움이 된다고 생각하지 않기 때문이다.
철학을 왜 어렵고 불필요하다고 생각할까.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철학 교과 수업과 시험 방식을 반성할 필요가 있다. 철학 수업에서 동양철학은 ‘역경’과 ‘서경’의 주요 내용을 다루고 나서 공자가 뭐라고 했고 노자가 뭐라고 했다는 식으로 강의하고 시험은 공자와 노자의 사상을 비교하라는 식으로 서술하기를 요구한다. 서양철학은 먼저 자연 철학자를 다루고 나서 플라톤이 뭐라고 했고 아리스토텔레스가 뭐라고 했다는 식으로 강의하고 시험은 어떤 철학자가 무엇을 말했는지 서술하라고 나온다.
강의와 시험이 이렇게 진행되고 보니 철학도 여느 교과목과 비슷하게 암기 과목이 돼버린다. 학문에서 철학의 역사가 얼마나 장구한가. 역사가 장구한 만큼 외워야 할 내용이 또 얼마나 많을까. 또 철학 강의에서 사용하는 개념과 논리는 엄격성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현실에서 그다지 잘 활용되지 않는다. 이러한 사정이 겹치게 되면 철학 교과목은 자연히 어렵고 현실에서 도움이 되지 않으니 필수가 아니면 듣지 않으려고 하는 기피 대상이 된다.
철학을 정의하는 방식은 여러 가지이다. 철학을 배우는 중요한 이유는 철학자나 사상가의 이름과 개념을 외우는 데 있지 않다. 철학을 선택하는 이유는 사람이 살아가면서 닥치는 수많은 문제 상황에서 멍청하고 어리석은 판단을 내리지 않도록 스스로 훈련하는 데 있다. 몇 년 전 한국의 출판계를 강타했던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보면 처음에 자연재해가 일어난 지역에서 호텔의 숙박비, 톱을 비롯한 연장을 평소보다 비싸게 파는 것이 올바르냐는 질문으로 시작되고 있다.
이에 대해 당연히 두 입장이 팽팽하게 맞설 수 있다. 공급이 부족하므로 평소보다 비싼 값에 팔아야 한다고 할 수 있고 반대로 곤경에 처한 사람을 상대로 터무니없는 가격을 요구한다고 할 수도 있다. 이 문제는 재수 없는 사람이 우연히 당하게 되는 극소수의 사례가 아니다. 우리 상황에서도 여러 가지 문제를 생각해볼 수 있다. 공적 마스크를 태어난 해를 기준으로 지정된 요일에 개당 1,500원의 가격에 한정된 수량을 살 수 있기 전의 상황을 떠올려보자. 마스크를 사려는 사람은 많지만 공급이 뒤따라주지 못해 시민들은 약국 앞에 장사진을 쳤고 마스크 가격도 평소보다 몇 배가 치솟았다. 마스크를 얼마에 파는 것이 공정한 것일까. 이러한 상황이 바로 철학의 문제이다. 이때 철학은 하나의 문제를 두고 시민이 논쟁의 상황에 들어가서 합리적 결론을 도출하고, 도출된 결론을 존중하는 자세를 취하도록 요구한다. 여기서 서로 다른 주장에 대해 조금의 타당성이 있다고 인정하지 않고 무조건 나의 의견을 관철하려고 하거나 합의된 결론을 걷어차 버린다면 우리는 철학 이전의 정글 상황에 빠지게 된다.
철학 이전의 정글 상황으로 가지 않으려면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하나씩 객관적으로 검토하면서 더 나은 대안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적 마음을 지녀야 한다. 이는 공자가 300편이 넘는 ‘시경’의 시를 한마디로 요약한 “생각이 삐뚤어짐이 없다(시삼백·詩三百 일언이폐지·一言以蔽之 왈사무사·曰思無邪)”는 말에 잘 담겨 있다. 나만이 옳다고 생각하면 이미 결론이 한쪽으로 기울어져서 다른 주장을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 내가 옳다고 하더라도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보고 나름대로 옳다면 그쪽에 동의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생각의 균형을 갖추게 된다. 나만이 옳은 것이 아니라 상대도 옳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둔다면 철학은 어렵고 불필요한 배움이 아니라 누구나 관심을 두고 활용해야 할 배움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