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내와 처음 연애할 때만 해도 아내를 제 왼편에 두고 걸어본 적이 없었어요. 아내가 다친 제 손가락을 볼까 두려웠거든요.”
지난 2004년 해병대 복무 중 불의의 사고로 왼손 검지가 절단된 A(39)씨는 17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날의 악몽을 잊을 수 없다. 해병대 화학병으로 복무하던 그는 본적도 없던 ‘클레이모어 지뢰’ 모의격발을 보조하라는 지시를 받았다. 간단한 일이라는 말에 지시대로 격발기를 누르는 순간 ‘펑’하는 굉음과 함께 고통이 밀려왔다. 그로부터 십수년이 흘렀지만 A씨는 남들보다 짧은 손가락이 여전히 어색하고 불편하다. 혹시 상대가 불쾌할까 다친 손가락을 보여주는 것도 조심스럽다. 군 복무 도중 다쳤지만 그가 국가로부터 받은 것은 아무것도 없다. 2012년에 이어 5월 국가보훈처에 재차 국가유공자 신청을 했지만 ‘기준미달’이라는 허망한 답변만 돌아왔다.
A씨처럼 군 복무 중 심각한 부상을 당하고도 보훈지원 기준의 높은 벽에 가로막혀 억울함을 삼키는 이들이 많은 것으로 나타났다. 현 정부는 “국가유공자·유가족 보훈이 정부의 가장 중요한 정책과제”라고 강조했지만 정작 관계부처는 여전히 예산문제를 이유로 유공자 지원에 난색을 표하고 있다.
8일 국가보훈처 등에 따르면 군 복무 중 부상을 입은 인원과 이중 국가유공자 인정기준이나 보훈 지원혜택을 빗겨난 청년들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 정부는 정확한 실태 파악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보훈처는 해마다 군경의 상이등급 판정결과를 취합하고 있지만 그뿐이다. 이 중 군 복무 피해자가 얼마나 되는지 따로 파악하고 있지 않다. 국방부도 매년 복무 중 부상을 입은 사병이 얼마인지 집계조차 하지 않고 있다.
국가를 위해 헌신하다 다친 이들의 아픔을 끌어안기에 현행 상이등급 판정기준이 지나치게 높다는 지적도 나온다. 국가유공자 인정·보훈 보상대상자 선정기준을 담고 있는 현행 ‘국가유공자 등 예우 및 지원에 관한 법률’에 따르면 A씨처럼 손가락 부상을 당한 경우 국가유공자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손가락 세 마디 중 두 마디가 정상 각도보다 절반 이상 움직임이 제한돼야 한다. 예컨대 90도가 정상 각도라면 두 마디의 움직임이 모두 45도 이하로 제한돼야 한다는 뜻이다. 결국 A씨는 불의의 사고로 손가락 한마디가량이 사라졌지만 이 기준에 미치지 못해 한 푼도 지원받지 못했다. 이에 대해 보훈처 관계자는 “현행 기준이 충분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다”면서도 “그렇다고 한꺼번에 판정기준을 모두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어느 하나만 먼저 대폭 바꾸면 형평성 문제가 발생한다”고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정부예산을 확충해서라도 국가유공자들에 대한 지원안이 보다 현실화돼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김형남 군인권센터 사무국장은 “국방부에서 일시 지급하는 장애보상금을 받는 것도 쉽지 않지만 전역한 뒤 보훈처의 국가유공자 인정절차는 훨씬 더 까다롭다”며 “국가를 위해 일하다 다쳤지만 이런저런 이유로 제대로 된 보상을 받지 못해 결국 국가와 소송을 벌이는 이들이 너무도 많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해 현재 국회에서는 관련법 개정이 추진되고 있다. 개정안을 준비 중인 전용기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가를 위해 복무하다가 다친 것을 온전히 개인이 부담해야 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며 “재원 조달방식 등을 두고 갑론을박이 있을 수는 있지만 국가가 책임을 지는 게 올바른 방향”이라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