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소기업을 경영하는 김모 사장은 얼마 전 운영자금이 필요해 은행을 찾았지만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창구에서 상담을 했더니 재무구조가 좋지 않다는 이유로 연 13%의 높은 금리를 요구했기 때문이다. 요즘 같은 초저금리 시대에 터무니없는 조건이었지만 은행 직원의 입장은 완강했다. 리스크 관리 차원에서 어쩔 도리가 없다는 것이었다. 김 사장은 결국 보험사로 발길을 돌려 8%대의 보험계약 대출을 받아 직원들 월급을 줘야 했다. 정작 돈이 필요한 기업은 까다로운 조건과 고금리의 벽에 가로막혀 자금난에 시달리는 현실을 보여준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 사태 이후 경제를 살리겠다며 풍부한 유동성이 공급됐지만 금융시장의 양극화는 오히려 심화하고 있다. 한국은행이 기준금리를 잇따라 내린데다 정부가 세 차례에 걸쳐 59조원의 추가경정예산을 편성하면서 시중에는 돈이 넘쳐나고 있다. 상반기에만 은행 금고로 들어온 돈이 108조원에 달할 정도다. 이런데도 주변에는 자금난에 허덕이는 기업이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위기 때마다 수많은 중소기업이 쓰러지고 금융 양극화가 심화하는 일이 어김없이 반복되는 셈이다.
가계 대출도 마찬가지다. 설령 부동산 담보가 있더라도 대출을 받기란 그리 만만한 게 아니다. 지인은 노모의 험난한 대출 경험담을 전했다. 지방 아파트를 담보로 은행을 찾아갔더니 소득을 증빙할 만한 서류가 있어야 한다며 거부당했다고 한다. 주택담보인정비율(LTV)과 총부채상환비율(DTI) 등 서슬 퍼런 규제 앞에서 신용카드나 연금소득이 없는 노인에게 대출이 가능할 리 없었다. 보증보험을 이용할 수도 있지만 이마저도 확실하지 않다고 했다. 투기지역 여부를 떠나 소득을 충분히 입증하지 못하면 대출이 사실상 불가능한 형편이다. 당국의 무차별적인 규제가 융통성을 찾아보기 힘든 까다로운 대출 풍속도를 만든 것이다.
정부가 부동산 투기를 막겠다며 관련 정책을 수시로 바꾸다 보니 대출규정은 난수표처럼 복잡해졌다. 인터넷에는 ‘작업대출자’나 대출 관련 컨설팅 업체가 우후죽순처럼 등장하고 대출방법을 알려달라는 하소연이 쏟아지고 있다. 얼마 전에는 한 은행에서 아파트를 제외한 다세대·다가구의 전세자금 대출을 중단했다가 이를 철회하는 소동을 빚기도 했다. 정부가 은행 창구를 무리하게 옥죄다 보니 애꿎은 서민과 신용 취약계층만 피해를 보는 것이다. 소득이 변변하지 않거나 신용이 입증되지 않는 취약계층의 안전망은 어떻게 확보할 것인지 생각해볼 문제다.
코로나19 사태 이후 은행들은 정부의 잇단 정책자금 대출에 총대를 메야 했다. 소상공인 대출이니 자영업자 지원이니 해서 우대금리를 적용하고 이자 납부를 유예함으로써 급한 불을 끄는 데 앞장섰다. 은행들은 이번에는 ‘한국판 뉴딜’ 사업에 참여한다며 태스크포스(TF)를 가동하는 등 야단법석을 떨고 있다. 하지만 내심으로는 집권 후반기의 정책에 동참하는 데 불만의 목소리가 높다. 5년짜리 정책이 다음 정권에도 계속 이어질 것이냐는 의구심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현 정부의 금융산업에 대한 인식이다. 경제성장을 이끌어내는 금융산업의 비전과 미래에 대한 큰 그림을 제시하지 못한 채 단지 정책 도구로만 활용한다는 것이다. 금융 홀대론이다. 금융을 엄연한 산업으로 인정하지 않고 단지 기업의 돈줄 역할을 하는 수단으로만 본다는 지적이다.
미국 스탠퍼드대의 로널드 매키넌 경제학 교수는 일찍이 ‘금융억압(financial repression)’을 경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시장에서 자유롭게 움직여야 할 자금을 정책 수단을 동원해 인위적으로 끌어오면 반드시 부작용을 빚게 마련이라는 것이다. 중국 등 신흥국의 낙후된 금융시스템을 문제 삼던 이론이지만 당국의 금융억압이 시장 왜곡을 초래하고 부동산과 주식시장으로의 쏠림현상을 가속화하는 우리 현실을 돌아보게 만든다. 정부 만능주의가 판치는 지금 되새겨볼 만한 말이 아닐 수 없다. ssang@sedaily.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