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노벨과학상 수상을 위해 기부한다고 하면 공돈을 번 줄 알아. 잠 안 자고 번 돈인데….”
이수영(84·사진) 한국과학기술원(KAIST) 발전재단 이사장은 지난달 27일 서울 여의도 맨하탄빌딩 사무실에서 서울경제신문 창간 60주년 특별 인터뷰를 갖고 “‘죽으면 가지고 가나’라는 생각에 전 재산을 기부하기로 결심했으나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 같다”며 이같이 말했다. 경기여고와 서울대 법대를 나온 그는 지난 1969년부터 1980년까지 서울경제신문 기자였으며 지난 8년간 KAIST에 766억원을 내놓아 화제를 모았다.
이날 그는 “피곤해 무리하면 안 된다”면서도 5시간30분 동안 노인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삶의 철학과 에피소드를 파노라마처럼 펼쳐냈다. 딱 ‘여장부’의 모습이었다.
“일제강점기도 보고 한국전쟁도 겪었는데 과학기술의 힘으로 우리가 잘사는 거야. 미국이 세계를 제패하는 것은 과학기술의 힘인데 우리가 미국 사람보다 머리가 나아.” 본지가 올해 강조하는 ‘과학기술 초격차’ 전략과 맞닿는 말이다. 이를 위해 연내 ‘이수영과학교육재단’을 만들어 과학 인재를 적극 지원하겠다고 했다. 그는 2012년 80억원, 2016년 10억원 상당의 미국 부동산을 KAIST에 내놓았고 이번에 재단에 676억원 가치의 부동산을 출연하기로 했다. 그는 “부동산 평가도 올해 끝내고 나머지 부동산도 죽기 전에 전부 재단에 출연할 것”이라며 “최대 1,000억원 정도는 되지 않을까 기대한다. 재단에서 내년에 연 5억원의 이익금부터 시작해 KAIST에 지원금을 늘려나갈 것”이라고 밝혔다.
“KAIST는 과학자들이라 나만큼 경영능력이 없어 재단에서 관리하려는 거야. 내가 돈 불리는 것을 잘하거든. KAIST가 내년 개교 50주년인데 이제 노벨상도 받을 만하지 않아. 뜻있는 분들은 동참해줬으면 좋겠어.”
1936년 서울에서 4남4녀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어려서 병약해 부모님이 거의 안고만 키울 정도로 귀하게 컸다. 일제강점기 때 충남 홍성에서 서울로 오다 아버지가 왜경에게 쌀을 빼앗기는 것도 봤고, 한국전쟁이 터진 뒤 1·4후퇴 때는 가족과 함께 의왕 모락산까지 피란 갔다가 오히려 교전현장에 발을 들여놓아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늘 최고라고 생각하며 자랐지. 일류 학교를 다니며 집안의 중심이 되기도 했고.”
하지만 대학 3학년 때 사법고시에 떨어지고 몸까지 망가지는 고통을 맛본다. 우연히 영어학원에서 기자시험 공고문을 보고 1963년 서울신문 기자시험에 합격했으나 수습 4개월 만에 파벌 다툼이 싫어 퇴사했다. 다음해 현대경제일보에 들어가 4년 있었는데 “3류 신문으로 아주 X판이었어…”라며 손사래를 친다. 1969년 서울경제에 둥지를 튼 뒤 비로소 인생의 꽃을 피운다. “발로 뛰느라 골프를 못배웠지. (1980년 전두환 신군부에 의한 강제폐간 전) 서경은 시장점유율이 70%가 훨씬 넘어 경제여론을 주도했고 필독신문이었어. 당시 언론계에 성차별이 심하기는 했지만 창업주인 백상(百想·장기영 전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애국자이고 인재를 아꼈어. 12년 가까운 서경 기자 시절이 인생의 황금기라고 불러도 좋을 만큼 값진 시간이었어. (백상이 1977년 숨지고) 1980년 노조 설립을 주도했다는 오해로 강제해직되기는 했지만 서경을 친정으로 생각해.”
당시 그는 이병철 삼성 회장이 한국비료의 사카린 밀수 사건 이후 기자를 피할 때도 골동품 취재 명목으로 이 회장을 만났다. 박동규 전 재무부 장관의 소개로 인연을 맺은 홍재선 당시 전경련 회장이 이 회장에게 전화해준 덕을 봤다. 골프와 미술품·골동품 수집이 취미였던 이 회장은 고종황제의 아들인 영친왕이 생활고로 도쿄 골동품상에 판 골동품이나 그림, 궁중화가였던 오원 장승업의 그림이 헐값에 거래되는 것을 보고 많이 사들였다.
“‘사업보국’이 붙어 있는 사무실에 들어서니 용인 자연농원을 만들 때라 목축에 관한 일본 책을 넓은 책상에 산처럼 쌓아놓고 있더라고. 처음에는 냉혹하게 폐부를 찔러보는 안광(眼光)이었는데 점차 아버지 눈빛으로 변했어. 오원이 비단에 그린 춘(春)·추(秋) 두 폭의 그림을 보고 이 회장이 예술품을 모으는 배경도 들었지. 근데 골동품이나 그가 갖고 있다고 알려진 청동기 칼과 가야금관은 못 봤어.” 이 회장 취재에는 정양모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사(위당 정인보의 아들)가 동행했다. 이는 호암미술관이 중앙박물관과 함께 한일 수교 10주년 기념 일본 전시회에 많은 미술품을 전시하는 계기가 된다. “이 회장은 다음에 만나면 먼저 말을 거는거야. 1980년 전경련 회장단 회의에서 단체사진을 찍을 때도 ‘이수영 기자 이리와’ 하며 정주영 회장과의 사이에 서게 한 뒤 어깨동무를 하더라니까. 이 회장 취재 뒤 다른 재벌 회장 취재하기가 용이해졌지.”
정주영 현대 회장에 대해서는 아침7시에 인터뷰 오라고 할 정도로 “아주 부지런하고 머리가 좋고 애국자였다”고 했다. 1973년 오일쇼크가 왔을 때 정 회장이 선박 모형을 보여주며 ‘내가 선박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라며 조선업의 구상을 비친 일화도 들려줬다. “한번은 유럽·중동 경제사절단 동행취재를 했는데 정 회장이 ‘바레인 아스리조선소에서 한식 잡숴봐요’라고 하는 거야. 현지인이 안 먹는 꼬리찜으로 맛있게 대접한 거지.” 정 회장은 사우디아라비아 연안에서 부두가 없어 하역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 때도 빔(철골조)을 엮어 똑딱선으로 끌고 가 임시부두를 만드는 아이디어를 내기도 했다고 했다.
졸지에 빚쟁이에게 쫓겨 다니던 이양구 전 동양그룹 회장 특종 인터뷰라든지 동네 오빠이던 한용철 전 서울대병원장과의 일화 등을 회고하던 그는 “나도 참 피나게 돈 벌었다”며 사업 얘기로 옮겨갔다.
“서울에서 태어났지만 심훈의 ‘상록수’처럼 농촌을 잘살게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지. 당시는 전라도 등에서 공장이 없으니 서울로 몰려 드는데 영등포 쪽방촌에서 한 방을 놓고 밤에는 여공이 자고 낮에는 야간작업하는 남공이 잘 정도로 어려운 시절이었어. 빈부격차도 커졌고.” 그는 서울경제 기자를 하던 1971년 ‘농공병진(農工竝進·농업과 공업이 같이 나아감)’에 공감한데다 목장을 하던 주간한국 국장으로부터 돼지 두 마리를 선물받아 경기도 안양에서 목축업에 뛰어든다. 낮에는 취재를 하고 밤이나 주말에 돼지와 소를 키운 것이다. “한번은 안양천이 범람해 지대가 높은 목장의 문지방까지 물이 찰 정도로 수해가 났어. 반신불수 중풍인 엄마한테 가지 못해 밤새 발을 동동 구르는데 기사가 통나무를 타고 들어가 엄마를 보호해줬지. 다음날 물이 빠진 뒤 도처가 진흙투성이에 뱀이 널브러져 있고 풀에는 기름이 묻어 있고 난리였지. 급한 대로 시장을 다니며 동물 먹일 것을 구했어. 사료로 쓰려고 하천 부지에서 옥수수를 재배해 사일로(원통형 창고)도 만들었는데 예쁜 다리에 상처도 많이 났어.”
나중에는 돼지 1,000여마리, 소 15마리 규모까지 목장을 키우는데 돼지 파동으로 돼지 가격이 폭락하고 우유 파동으로 중랑천에 우유를 버리는 업체까지 나올 정도로 우여곡절을 겪는다. “정부와 기업에 있는 서울대 법대 동창들을 찾아 돼지는 국군장병 위문품으로, 우유는 초등학교 납품으로 활로를 찾았어. 다른 회사의 반품 우유도 받아 소한테 먹여 소가 부쩍 컸지. 소로 떼돈을 벌었지. 그 뒤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면 ‘내 덕에 우유 먹고 저렇게 됐다’고 했지. 머리를 써야 해.”
강제해직 뒤에도 중풍으로 고생하는 엄마 수발들랴, 본격적으로 농장 일하랴 고달팠지만 기쁜 마음으로 했다. 오갈 데 없는 아이들을 거둬 같이 생활하기도 했다. “진짜 고생 많이 했어. 나중에 목장이 수용돼 애환이 심했지. 목장 하천의 모래를 누가 퍼가는 것을 보고 1988년부터 하루 종일 모래와 흙먼지 마셔가며 모래를 팔았지. 늘 입이 근질근질했어. 그해 은행에 다니던 대학 동기가 힌트를 줘 주차장이 넓은 여의도백화점(현 맨하탄빌딩) 한 층 인수계약을 하고 오는데 치주염으로 입안에 피가 가득했어. 이가 다 빠질 뻔해 돈 많이 들어갔지.” 이 과정에서 전기도 꺼져 난장판인 건물을 정비하는 데 철거업자가 2,000만~3,000만원 달라는 것을 직원들과 같이 100만원에 다 수리했다. 증권예탁원 등 공공기관 여러 곳이 입주하는 등 일이 잘 풀리는 듯했다.
하지만 빌딩 관리 책임을 맡은 상황에서 집합건물관리단에서 예치한 3억원을 노린 조폭에 생명의 위협을 느끼기도 했다. “1998년께 깡패 100명이 들어와 관리권을 빼앗고, 청부살인을 당할 수도 있어 심야에 대전으로 한 달쯤 피신했어.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신장암으로 왼쪽 신장을 잘라냈지. 오줌 잘 나오라고 늘 옥수수수염차를 마시지.” 결국 그는 소유주와 상인들의 신뢰를 쌓아가며 빌딩에서 매물로 나온 상가와 사무실을 계속 사들였고 올해까지 맨하탄빌딩 지분을 3분의1까지 확보하게 된다. 그의 관리하에 건물 가치도 덩달아 크게 높아졌다. “좌절을 겪을 때도 원망하지 않아. 끈만 잡으면 확 일으키고 별 밑천 안 들이고 키운다고. 오뚝이 인생이야. 나폴레옹처럼 ‘불가능이 없다’는 마음으로 살았지. 다만 증권은 안 했어.”
참여정부 말 300만달러까지 해외투자가 허용되자 ‘기회다’ 싶어 독산동 빌딩을 담보로 대출받아 미국 부동산 시장에도 진출한다. “처음에 브로커들이 자꾸 쇼핑센터만 보여주길래 공공기관이 입주한 건물을 소개해달라고 했지. 성조기가 펄럭이던 건물을 샀는데 얼마나 국위선양이야. 재미를 톡톡히 봤는데 10년쯤 뒤 연방정부의 재정이 어려워지며 갑자기 해약했어. 갖고 있으면 병 될 것 같아 KAIST에 기부하게 됐지.” 미국 매사추세츠공과대(MIT) 석좌교수를 거친 서남표 KAIST 총장이 TV에서 “국가 발전에 과학기술의 힘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을 보고 KAIST로의 기부를 결심한다. “서 총장이 참여정부 때 들어와 6년 반 총장을 하며 과학발전을 이뤘는데 작당해서 들쑤셔 몰아낸 것은 잘못이야.”
이 이사장은 “우리나라 국내총생산(GDP)의 16%를 차지하는 삼성전자의 반도체 석·박사 연구인력 25%가 KAIST 출신이다. 과학 인재를 키워야 한다”며 “서울대 법대 나오면 사회지도층이 되는 경우가 많은데 직무를 이용해 사리사욕을 채우는 사람이 있어 싫증이 났다”고 비교했다. “부동산이라든지 세금 폭탄에 힘들어. 그렇지 않았으면 기부를 더 많이 했을 거야. 몇 년 전 초기 치매를 겪다가 치료 잘 받고 약 먹으며 극복했어. 정신 말짱해. 과학재단의 법적 울타리는 우창록 율촌 명예회장이 해주고 내가 죽으면 내 말을 바이블로 알고 15년 정도를 배운 (큰언니의) 손자가 재단을 운영하며 KAIST를 지원하도록 할거야.” /고광본 선임기자 kbgo@sedaily.com
She is...
△1936년 서울 △1956년 경기여고 졸업 △1960년 서울대 법대 졸업 △1963년 서울신문 수습기자(4개월) △1964년 현대경제일보 기자 △1969년 서울경제 기자 △1971년 광원목장 창업 △1980년 서울경제 퇴사 △1988년~ 광원산업 대표 △2010~2012년 서울대 법대 장학재단 이사장 △2012년 KAIST 명예박사 △2013년~ KAIST 발전재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