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1위 파운드리(반도체 위탁생산) 업체인 SMIC가 올해 설비투자액(CAPEX)을 연초 예상치 대비 2배 이상 늘리며 공격적 투자에 나선다. SMIC의 올해 설비투자액은 지난해 매출의 2배 이상으로 중국 정부의 ‘묻지마 지원’이 원천이라는 주장이 나온다. 특히 화웨이 자회사 하이실리콘을 비롯한 중국 팹리스(반도체설계전문) 업체들이 미국 제재로 글로벌 1위 파운드리업체인 대만 TSMC와의 협업이 불가능해지자 SMIC 지원이 보다 노골적으로 진행되는 모습이다.
11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SMIC는 올 2·4분기 실적발표 자리에서 “올해 설비투자로 67억 달러를 투자할 것”이라고 밝혔다. SMIC는 애초 올 설비투자액을 32억 달러로 전망했지만 1·4분기 실적 발표 후 이를 43억 달러로 늘려 잡은 후 3개월만에 또다시 투자액을 높였다. SMIC의 올 2·4분기 매출은 전년 동기 대비 18.7% 증가한 9억3,800만달러를 기록했으며 파운드리 가동률은 98.5%로 전년 동기 대비 7.4%p 증가했다. 자국 고객사 비중은 66.1%로 전년 동기 대비 9.2%p 상승했다.
SMIC의 이 같은 설비 투자액은 지난해 매출액(31억1,600만달러)의 2배가 넘으며 올 상반기 매출액(18억4,000만달러)의 4배 수준이다. TSMC의 올 설비 투자예상액이 160억~170억달러 규모라는 점에서 SMIC가 TSMC의 투자액의 40% 수준을 올해 집행한다는 점도 주목할 부분이다. 시장조사기관 트렌드포스에 따르면 TSMC의 올 2·4분기 파운드리 시장 점유율은 51.5%인 반면 SMIC는 4.8%에 그쳤다.
SMIC의 이 같은 급격한 CAPEX 증액 배경에는 사실상 중국 당국의 ‘밀어주기’가 자리하고 있다. SMIC는 본사인 상하이를 비롯해 중국 내에 9개 공장을 운영 중이며 각 공장이 자리한 지방정부로부터 상당규모의 보조금 및 세제 혜택을 받는 것으로 전해졌다.
SMIC 지원을 위한 세제 혜택도 갈수록 노골화 되고 있다. 중국 국무원은 최근 업력 15년 이상의 반도체 제조기업이 28나노(1나노=10억분의 1m) 이하의 미세 공정을 도입할 경우 최대 10년간 법인세를 면제해주기로 했다. SMIC의 주력이 14나노 공정이라는 점에서 사실상 SMIC를 지원하기 위한 정책이란 분석이 지배적이다. SMIC는 지난달 ‘중국의 나스닥’으로 불리는 상하이증권거래소 과학혁신판 2차 상장을 통해 9조원 가량의 자금을 모으기도 했다.
올 2·4분기 글로벌 1위 스마트폰 업체로 등극한 화웨이의 밀어주기도 투자 확대의 주된 배경 중 하나다. SMIC는 화웨이로부터 14나노급 애플리케이션 프로세서(AP) ‘기린 710A’를 주문받아 양산에 나서는 등 수익 구조가 점차 안정화 되고 있다. 미국 제재로 TSMC와의 협업이 불가능해진 화웨이는 SMIC와 협업을 확대하고 있으며, SMIC 또한 올해 7나노 공정 업그레이드를 계획 중에 있는 등 화웨이와 보폭을 맞추기 위해 애쓰고 있다. 퀄컴의 최신 모바일 애플리케이션프로세서(AP)인 ‘스냅드래곤 865+’를 비롯해 삼성전자(005930)의 ‘엑시노스990’이 모두 7나노 공정 기반으로 생산 중이라는 점에서, SMIC의 공정 업그레이드가 계획대로 진행될 경우 업계 최상위 파운드리 사업자와의 기술 격차를 1년 이내로 좁힐 수 있는 셈이다.
SMIC는 지난 2017년 대만국적의 양몽송(梁孟松) 전 삼성전자 부사장을 영입한 후 기술력을 빠르게 끌어올리고 있다. 양 전 부사장은 미세공정과 함께 반도체 효율을 높이는 데 핵심 역할을 하는 ‘핀펫’ 공정 전문가로 잘 알려져 있다. 실제 SMIC는 홈페이지를 통해 “SMIC는 1세대 핀펫 공정을 통해 지난해 4분기 반도체 양산에 성공했으며, 이는 중국 본토의 가장 진보된 기술력을 입증하는 것”이라고 밝히는 등 양 전 부사장 영입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하이실리콘의 설계 인력이 최근 칭화유니그룹 산하의 팹리스 유니SOC로 대거 이적한 만큼, 칭화유니그룹 또한 향후 다량의 반도체 물량 발주로 SMIC 성장에 일조할 전망이다.
중국 정부 입장에서는 SMIC의 급격한 성장이 ‘차이나 반도체 굴기’를 위해 필수다. 시스템 반도체 생태계는 팹리스와 파운드리의 ‘2인 3각’ 체제로 돌아가는데, 미국 제재로 TSMC를 중심으로한 파운드리 공급망이 깨진 상황이다. 중국은 팹리스 분야에서는 세계 정상급인 하이실리콘을 보유한 만큼 SMIC의 기술력도 세계 정상 수준으로 끌어 올려야 반도체 굴기가 가능하다. 특히 중국은 모바일 AP 외에도 사물인터넷(IoT), 자율주행차용 반도체 까지 반도체 생태계를 확장할 계획이다.
오는 2030년 파운드리 시장 1위 등극을 노리는 삼성전자로서는 이같은 SMIC의 투자 확대가 부담이다. 삼성전자의 ‘반도체 비전 2030’은 이재용 부회장이 직접 진두지휘할 정도로 삼성전자의 미래가 달려있는 사업이다.
물론 SMIC의 기술력 업그레이드는 한계가 있다. 미국 제재로 네덜란드 ASML이 독점 공급하는 극자외선(EUV) 노광장비 도입에 제한이 생겨 5나노 이하 공정 제품 양산이 불가능한 탓이다. 반면 이 같은 하이엔드 제품을 제외한 대부분 반도체 양산은 멀티패터닝 기술 및 불화아르곤(ArF) 기반 노광장비만으로도 가능하다. 중국 팹리스 생태계 확대의 과실(果實)을 SMIC가 오롯이 따갈 수 있는 셈이다.
최근 맞춤형 반도체 수요가 늘어나며 10나노급 공정 만으로도 생산 가능한 ‘필드프로그래머블반도체(FPGA)’ 시장이 커지고 있는 것 또한 SMIC의 성장을 낙관하는 배경 중 하나다. TSMC 따라잡기도 벅찬 삼성전자 파운드리 사업부로서는 SMIC의 추격까지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연출되는 모습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최근 삼성 파운드리 사업부가 인텔의 CPU를 수주할 수 있다는 전망이 제기되지만 인텔이 통신칩이나 GPU가 아닌 CPU를 외부 위탁하는 것은 아직 먼 미래의 시나리오”라며 “오히려 SMIC가 빠르게 기술을 업그레이드하며 삼성전자를 비롯한 상위 파운드리 사업자의 시장 파이를 갉아 먹을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고 밝혔다. 실제 인텔의 10나노 공정 회선폭은 삼성전자나 TSMC의 7나노급으로, 인텔은 회선폭 측정시 여타 업체 대비 보다 엄밀한 잣대를 들이대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 파운드리 사업자들이 공개하는 초미세 공정 수치가 ‘마케팅’ 성격이 강하기 때문으로, 삼성전자·TSMC와 인텔간의 초미세공정 격차가 세간에 알려진 것 대비 크지 않은 셈이다. 특히 초미세 공정이 지나치게 고도화되며 ‘양자간섭’ 우려까지 나와 추가적인 공정 고도화가 쉽지 않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기술력이 다소 떨어지더라도 자국 팹리스의 확실한 지원을 받는 SMIC의 성장세가 위협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